존재와 부재의 증명

성현아 문학평론가

이달 초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로기완>(2024)은 살기 위해 벨기에로 밀입국한 탈북인 ‘기완’의 삶을 들여다보는 조해진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각색한 영화다. 영화가 보여주는 사랑으로의 성급한 귀결은 배우들의 호연으로도 잘 봉합되지 않는 듯해 아쉬웠지만, 기완이 낯선 땅에서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장면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는 자신이 북한 사람임을 증명하기 위해 생의 굵직한 사건들을 진술한다. 이때 어머니의 시신을 병원에 넘기고 돈을 마련했던 비극적인 사연까지 이야기하게 되는데, 해당 병원이 그러한 불법적인 행위를 한 적 없다고 발뺌하자 기완은 궁지에 몰린다. 설상가상 증인으로 나서주겠다던 공장 동료 선주는 그를 배신하고 로기완이 정치적 망명이 인정되는 북한 사람 행세를 하여 난민 지위를 획득하려는 조선족이라고 거짓 진술한다. 기완은 난민의 자격을 갖추었지만 이를 입증하지 못해 고초를 겪는다.

이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다니엘’이 실업급여를 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음에도 서류를 온라인으로 제출하라는 관공서의 요구 앞에 무력해지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노인인 다니엘은 구직을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곳저곳 전전하며 그 경험을 일일이 수기로 작성해 가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런 형식은 인정되지 않는다는 차가운 답변뿐이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잡한 심사 절차 앞에 번번이 좌절하는 인물들을 보며 비참함, 연민, 수치심과 같은 단어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언어를 초과하는 감정을 느꼈다. 여전히 나는 이를 형언할 어떠한 단어도 찾지 못했다.

각자의 처지는 다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와 같이 존엄성을 위협해 오는 황당하고도 잔인한 상황에 공감할 수 있다. 사람을 쉽게도 모욕 주는 이 사회의 시스템을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성실을, 당신의 가난을, 당신의 당신 됨을 입증하라고 다그치며 인간을 문밖에 세워두기만 하는 거대하고도 견고한 성 앞에서, 영영 문서화되지 않을 단서들만 잔뜩 안아 들게 되었을 때 느끼는 허탈감과 울분을 우리는 깊이 이해한다. ‘나’를 구성하는 생의 파편들이 서로 아귀가 맞지 않아 조각조각 무용해질 때의 막막함 역시 잘 알고 있다.

조해진 작가가 <로기완을 만났다>에 서술했듯, “우리의 출생과 죽음, 결혼과 건강을 기록하는 관공서의 수많은 서류들”은 “개인의 절대적인 존재감”이나 살아온 삶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인격적 주체를 배제하며 생체정보만을 감시하는 현 사회의 모순적인 통치 방식을 지적한 바 있다. 범죄자들의 신원확인에 활용되었던 인체측정학 기술이 20세기 이후 모든 시민을 대상으로 확장됨에 따라 정체성은 개성과 인격과 무관해진 채, 생물학적 데이터로서의 기능만을 지니게 되었으며, 인간은 자기 정체성에 관여할 수 없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고 말았다는 진단이다.(<벌거벗음>, 김영훈 옮김, 인간사랑, 2014) ‘나’의 정체성은 본질적인 ‘나’와 무관해졌으며, ‘나’를 입증하는 생체 정보들에 ‘나’는 개입할 수 없으므로 ‘나’로부터 ‘나’가 철저히 소외되는 아이러니가 생겨버린 것이다. 아감벤이 정체성의 변화와 그 기원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정체성을 규정 및 관리하는 작금의 제도가 결코 ‘자연 그대로’는 아니라는 사실을 내보이기 위해서일 테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을 증명하는,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든 당신을 부정하는 서류들과 씨름하며 당신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견뎌내고 있는지. 우리는 얼마나 오랜 시간 우리와 동떨어진 이력으로 우리를 입증하고 우리로부터 추방당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내 존재를 증명하는 모든 서류에 나는 부재한다.

성현아 문학평론가

성현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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