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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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착취할 때 실리콘밸리의 혁신가로 추앙받다가 각각 ‘사기꾼’과 ‘빌런’으로 전락한 샘 뱅크먼프리드와 일론 머스크. 이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있다. 바로 ‘롱터미즘’(Long-termism)이다. 트위터 인수 작업에 동참하고 싶다는 뱅크먼프리드의 의사를 머스크에게 전달하며 다리를 놓아주려 했던 사람도 롱터미즘의 주창자인 옥스퍼드대 철학교수 윌리엄 매캐스킬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아직 생소하지만 현재 실리콘밸리의 IT 거부들 사이에서 꽤 인기를 끌고 있다는 이 사상은 ‘효과적인 이타주의(EA)’라고 불리는 사회운동의 한 갈래이다. EA는 내가 한번도 가본 적 없는 수천, 수만 마일 떨어진 곳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생명은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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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지지자만 바라보는 ‘캠페인 정당’ ‘세상에서 가장 성공한 보수 정치.’ 영국 보수당은 전 세계 보수 정당들의 롤모델이었다. 국내에서도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대패하자 ‘300살 영국 보수당의 비결’을 배우라는 분석기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보수당은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2019년 열린 영국 총선에서도 대승을 거두며 승승장구했다. 그런 보수당이 전 세계의 근심거리가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지난 9월 취임한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경제 전문가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글로벌 경제 상황에 역행하는 섣부른 감세안을 발표했다. 그 여파는 영국을 넘어 세계 금융시장을 최악의 혼돈에 빠뜨렸다. 파운드화는 곤두박질쳤고, 영국은 시장의 신뢰를 잃었다. 취임 6주 만에 떠밀리듯 사퇴한 트러스는 보수당 내에서조차 ‘양상추’보다 수명이 짧은 총리라는 조롱거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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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기후변화에 ‘뉴노멀’이란 없다 파키스탄의 홍수가 심각하다는 말을 들은 누군가가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거기 원래 자주 홍수 나는 곳이잖아.” 파키스탄 정부가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때도 이미 누적 사망자는 1000명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맞다. 그의 말처럼 파키스탄은 원래 몬순철인 6~9월이 되면 종종 홍수가 나곤 한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지난 6월부터 두 달 넘게 하루도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비가 내렸다. 몬순이 시작된 후 불과 3주 만에 이미 한 해 전체 강수량의 60%에 달하는 비가 쏟아졌고, 현재는 190%에 육박한다. 파키스탄은 지난 두 달에 걸쳐 꾸준히 ‘익사’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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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뒤늦은 부고 1988년 미얀마는 민주화를 향한 열망으로 뜨거웠다. 랑군대학(지금의 양곤대) 물리학과 3학년이던 코 지미가 그녀를 처음 본 곳도 8888항쟁 시위 현장이었다. 교복을 입은 한 여학생이 몰려오는 군인들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발차기를 하며 싸우고 있었다. 훗날 그는 그 인상적인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아볼 새도 없이 곧 학생 시위를 조직한 혐의로 감옥에 끌려간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열아홉 살이었다. 악명 높은 인세인 교도소에 수감된 지미는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풀어낼 길 없는 그의 증오는 간수들을 향했다. 그때마다 돌아온 것은 가혹한 매질이었고, 그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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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소수 ‘2’에게 짝수가 되어주는 수학의 세계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입시교육에서 해방된 후에도 가끔씩 수학시험을 치는 악몽을 꿨다.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무한한 숫자들 속에서 내 미래를 쥐고 있는 듯한 단 하나의 숫자를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감. 무거운 중압감이나 초조함에 시달리는 일이 생길 때면 그날 밤 꿈속에서 나는 수학시험지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있곤 했다. 그 꿈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단순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오래돼서만은 아니었다. 나와 달리 수학을 무척 잘했던 한 친구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며 법학과에 갔지만, 후에 전공을 바꿔 이과 계열의 대학원에 진학했다. 친구는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씨름해야 하는 것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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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도시의 ‘표준’이 남성이 아니었다면 2016년, 그 여성은 왜 강남역 근처의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살해당해야 했을까. 2022년, 장애인들은 왜 지하철 안을 온몸으로 기며 오체투지를 해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페미니스트 지리학자인 제인 다크의 이 한마디로 설명될 수 있다. “우리의 도시는 돌, 벽돌, 유리, 콘크리트로 쓴 가부장제다.” 선반 높이부터 사무실 온도는 물론 고층 빌딩의 바람길까지, 알고 보면 이 도시의 모든 것은 성인 남성을 ‘표준 인간’으로 상정하고 지어진 것이다. 도시의 설계자들은 오직 안전한 화장실을 이용할 목적으로 스타벅스 커피를 사는 여성, 엘리베이터가 없어진 지하철역에서 울음을 터뜨리는 유아차 앞의 여성을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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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프로 라이프’와 ‘프로 건’의 끔찍한 합체 미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가장 첨예한 이슈는 여전히 임신중단과 총기규제다. 아직도 1960년대에 갇혀 있는 듯한 그 시대적 후진성도 놀랍지만, 임신중단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곧 총기규제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이란 사실엔 놀라움을 넘어 막막함마저 느끼게 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자면, 그 두 극단적 입장은 가장 먼 대척점에 놓여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배우 우피 골드버그는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의 목숨을 앗아간 텍사스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후 “총기규제 완화법에 서명한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 덕에 총기를 난사하기 아주 쉬워졌다”면서 “애벗 주지사는 총기 사건에도 임신중단 금지법을 적용해보라”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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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망각을 두려워 말라···뇌 속의 잔디처럼 꽉찬 기억을 정리하는 과정 우리는 왜 잊어야 할까 스콧 A. 스몰 지음·하윤숙 옮김 | 북트리거 | 284쪽 | 1만7500원 ‘9시간 이상 자면 기억력이 떨어진다’ ‘앉아 있는 시간이 길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인터넷에서 ‘기억력’을 쳐보니 우수수 쏟아지는 기사 제목들이다. 이런 연구 결과들이 얼마큼 사실에 부합하는지 알 수 없지만,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있다. 기억력에 대한 강박과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기야 더 나은 기억력을 갖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암기력이 곧 최고의 경쟁력인 한국 사회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망각은 인간의 기억 체계가 지닌 결함일 뿐이고, 과학을 통해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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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70도 경사로가 30도로 낮아진들 최근 영국에서 화제가 된 BBC 드라마 한 편이 있다. 제목은 <바버라가 앨런을 만났을 때>. 방영된 지 벌써 한 달 넘게 지났지만, “프라임타임 TV에서 이런 드라마를 보게 될 줄 몰랐다”는 놀라움과 감동의 후기들이 이어지고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영국 장애인 운동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바버라 리시츠키와 앨런 홀즈 워스. 영국 최초의 장애인 스탠드업 코미디언인 바버라는 1989년 휠체어 장애인이자 뮤지션인 앨런 을 만난다. 앨런은 카바레 무대 아래서 음악을 연주하고, 바버라는 무대 위에서 코미디 연기를 했다. 드라마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장애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함께 투쟁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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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모든 전쟁은 어린이를 향한다 모로코에서 5세 소년 라얀이 32m 깊이 우물에 빠졌을 때 전 세계 소셜미디어에서는 ‘라얀 구하기’(#Save Rayan) 운동이 펼쳐졌다. 구출 작업 상황이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고, 그걸 지켜보던 누리꾼들은 “밤새 한숨도 못 잤다”고 했다. 나흘 만에 구조된 라얀이 결국 숨을 거두자, 세계 각국 정상과 대사관들은 일제히 애도의 성명을 발표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불과 몇 주 전의 일이다. 한 소년의 생명 앞에 전 세계가 한마음이 됐던 그때와 지금은 과연 같은 세상이 맞을까. 전쟁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다지만, 한 아이의 생명 무게는 전쟁 전에 비해 0.001g도 더 가벼워지지 않았다. 불과 몇 주 만에 이 세계는 우크라이나에서 꺼져간 수백 명의 어린 생명과, 가족과 생이별한 채 낯선 나라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수백만 명의 아이들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더 ‘용맹’해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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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1996년의 미국과 2022년의 러시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일촉즉발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사무총장은 이 같은 상황이 ‘뉴노멀’이 됐다고 말했다. ‘신’냉전이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울 것 없는, 21세기의 일상이 될 것이란 암울한 예측이다. 러시아는 동독 국경 너머로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는 1990년의 구두 약속을 서구가 먼저 깨뜨렸다면서, 양보 불가능한 협상 조건으로 나토의 동진을 멈추겠다는 서약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는 핑계일 뿐이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진짜 속내는 소련 제국주의를 부활시키려는 야욕이란 의구심이 커지고 있지만,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까지 팽창해 온 나토로 인해 러시아가 느낄 위협감 또한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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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진의 사이시옷 민주주의의 얼굴 캄캄한 밤, 소년 티를 벗지 못한 한 앳된 청년이 그 나이 또래의 인파에 둘러싸여 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주위를 에워싼 사람들이 그를 향해 비춰주는 휴대폰 불빛 덕분에 선명하게 빛난다. 그는 무언가를 힘껏 외치고 있다. 모든 얼굴 근육을 써서 크게 벌린 입은 분명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언어를 쏟아내고 있으리라. 그의 한 손은 가슴 위에 굳게 얹혀 있고, 두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주변에는 그의 말에 박수를 치려는 듯 여기저기 치켜든 손뼉들이 뻗어있다. AFP통신의 치바 야스요시 기자가 2019년 아프리카 수단의 민주화운동 취재 현장에서 찍은 이 사진의 제목은 ‘올곧은 목소리’(Straight Voice). 2020년 세계보도사진전에서 ‘올해의 사진상’을 받은 이 사진을 본 순간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흔들리지 않는 자기확신과 신념으로 가득 찬 자의 얼굴은 이러하구나. 주위 사람들까지 가슴 벅차오르게 만드는 힘을 가진 얼굴. 야스요시 기자도 수상 소감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날 현장에서 그가 (아랍어로) 하고 있는 말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