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로 이루어진 삶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이반 일리치는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질료 또는 물질적 대상에는 역사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태초부터 물질은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해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질에도 역사가 있고 우리 인식에 따라 변화해왔다고 믿는다. 과거의 물과 오늘날의 H2O는 다른 것이다.”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안희곤 사월의책 대표

이런 말을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물질은 우리의 인식 여하에 따라 존재가 결정된다는 관념론적 주장이 아니다. 어차피 인간과 관련된 의미의 포획망 안에 걸려들지 않는 사물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의미도 없다. 우리가 아는 물질과 대상은 인간과 더불어 존재했고, 사회적으로 함께 변화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일리치는 사물 자체보다는 그것이 현재의 사물이 되게끔 한 역사와 이유가 중요하다고 본다.

나는 기후위기를 차디찬 ‘사실’로 다루는 자연과학이나 그 배후에 숨은 성장과 불평등의 ‘구조’를 다루는 사회과학만큼이나, 우리의 기후 인식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행동은 사실보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에서 나오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그레타 툰베리와 기후행동가들은 며칠 전에 끝난 영국 글래스고 기후협약 회의를 두고 “그린워싱 페스티벌”이라는 혹평을 가했다. 석탄발전의 중단도 아닌 단계적 감축에 겨우 합의한 결과에 대해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위선을 지적하는 한마디였다. ‘말 따로 행동 따로’는 우리들 자신도 예외가 아니다. 왜 사람들은 기후위기를 즉각적이고 감성적으로 인식하지 못할까. 분노가 없고 실감이 없으니 기후에 대한 걱정은 정치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기껏 쓰레기 배출을 줄이자는 개인 차원의 도덕에 머문다. ‘그린워싱’이라는 속죄의식은 국가와 기업들뿐 아니라 우리들 개인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현재의 안온한 삶은 전혀 다치지 않고 불편한 마음을 씻기를 원한다.

우리의 인식과 행동이 이 정도를 넘지 못하는 것은 아마도 은폐의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각 동 단위, 읍·면 단위에서 사람들이 쓰는 전기만큼 발전소를 그곳으로 옮기고, 한 동네가 배출하는 쓰레기를 그 안에서 모두 처리한다고 해보자. 또는 자기 지역에서 생산하는 제품과 농산물만 쓸 수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자신의 능력보다 훨씬 더 낭비하고 쓰면서, 그 부산물을 타 지역에 전가하면서 살고 있다. 상상이 아니다. 기후위기로 인해 식량 생산이 파국을 맞고, 그리하여 농촌이 빗장을 걸고 식량대국이 수출을 막으면 우리들 도시인은 굶어죽을 것이다. 허울 좋은 지방자치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마을자치와 자결권은 기후 문제와 맞닿아 있다.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일 텐데, 이런 민주주의가 관철된다면 우리는 저절로 소비를 줄이고 불편함을 감수하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은폐’와 ‘망각’은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가장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전략이다.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감각을 무디게 하고, 그렇게 얻은 행복을 모두에게 나눠주겠다고 약속하는 전략이다. 화폐와 신용을 남발하여 없는 사람도 소비하게 하고,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에 주목하게 한다. 수십 년 이상을 살 수 있는 집을 끝없이 사고팔게 하여 늘 주택이 부족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성장, 개발, 복지는 전부 은폐의 논리 위에 서 있고, 우리는 알지 못할 죄책감을 덜어줄 속죄의식에 매달린다. 이런 죄책감을 자극하거나 불편함을 견디자고 호소하는 정치는 인기가 없다. 은폐의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는 탓이다. 인간의 삶이 원래 유한하고 불편한 것임을 받아들이는 종교와 도덕과 미학적 감수성은 기후 문제에서 쏙 빠져 있고, 녹색성장과 그린뉴딜의 분장술이 인기이다. 이런 상황은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린워싱 속죄의식만이 당분간 이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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