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보다 못하는 것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우리끼리 잘하는 줄 알고 어화둥둥 좋아하다가, 국제무대에 오르면 세상 부끄러운 게 야구만이 아닐 거다. 어느 분야가 어째서 그럴지 미리 안다면, 배우려는 자세로 나중에라도 잘해보자고 다짐하며 준비라도 할 텐데. 국제무대에 오르기 전에 함부로 결과를 장담하며 떠드는 자세 때문에 예정된 실패를 겪는 걸 넘어 수치스러운 행태마저 보인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내가 외교를 몰라 그런 분야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에 대한 담론수준은 확실히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일제 강제동원과 피해자 배상청구를 둘러싼 국내 학계, 언론, 그리고 시민 간 토론을 관찰해 보면 그렇다. 이 정도 담론에 의존한 외교정책이 국제무대에서 예정한 성과를 낸다면 그게 더 놀랄 일이다. 국내 경기력은 부끄럽지만 국제 대회에 나가서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기를 바라는 이 염치없는 마음을 어쩌랴.

한 가지 관찰을 제시하자면 이렇다. 강제징용을 포함한 일제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이 1965년 한일기본조약으로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2012년 우리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우리 식자들의 견해가 모호하다. 대법원 판결을 놓고도 얼마든지 의견이 갈릴 수 있다. 판결을 따르는 정책적 해결방안도 이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합당한 해석이 필요하다. 시민에게 적극 설명해야 한다. 1965년 조약의 성격이 무엇인지, 그래서 식민지배 피해자 배상을 청구하는 권리는 살아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또는 그게 아니면 뭐 어쩌자는 것인지 설명이 어렵다면 해석이라도 제시해야 한다.

나는 묻는다. 국가 주권을 발휘해 체결한 국제 조약이 해당 국가의 주권을 형성하는 인민의 청구권을 원리적으로 제약할 수 있는가.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어떤 특별한 조건에서는 가능한가. 국제법상 인정되는 주권 존중의 원리가 국제조약의 재해석을 요구하는 인권의 원리와 충돌하면 정부는 어떻게 조화롭게 정책을 추진해야 하나. 과거 조약과 미래 정세를 고려하여 당대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정책의 설득력은 과연 어디에서 오나.

척 하면 종족주의로 몰아가고, 딱 보니 친일파라 낙인찍는 게 무슨 해명이라도 된다는 듯 말하는 자들의 품새가 동네야구 판정시비 수준이다. 그렇게 규칙도 판정도 필요 없다는 듯 몰아치면 동네야구에서 이길 수는 있겠다. 모든 건 국가이익일 뿐이요, 근본은 역시 민족정기라며 다른 생각은 필요 없다는 듯 말하는 자들의 말솜씨가 국가대표 중계방송 수준이다. 타당한 논변이 없이 입장만 반복하다 보니 진짜 선수들이 모인 대회에서 처참하게 깨져도 왜 졌는지 모른다.

식자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 정부가 이번에 제시한 제3자 변제방안을 일본정부가 수용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고.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중 하나는 이것이다. 일본은 19세기 제국주의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바로잡기 위해 법제를 갖추고 정치를 개혁함으로써 현대성을 갖춘 나라다. 마리우스 잰슨이 말했던 유신정치의 통주저음이다. 지금 우리는 주권을 강화해서 제국주의 불평등조약을 바로잡은 나라를 앞에 놓고 과거 조약의 효과를 재해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식민지배에 항거한 3·1운동에서 주권의 기원을 찾는 공화국이기에 얼마든지 가능한 요구이지만, 상대방의 수용 이전에 국제사회에서 통할 논변을 마련하지 않고는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질 줄 알면서 출전하는 일처럼 허망한 일이 없다. 질 것만 같기에 아예 경기를 회피하고 정신승리용 구호만 외친다면 그것은 패배한 상태보다 서글픈 존재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격이다. 그나마 왜 지는지 알기라도 한다면 반전의 기회를 노릴 수 있다. 나는 우리가 경기의 규칙을 이해하고, 규칙에 문제가 있으면 먼저 그것을 바로잡고, 자신과 상대방의 능력을 알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당하게 경기에 임해 최선을 다해 이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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