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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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모두의 존엄을 위한 차별금지법 누구나 삶의 어떤 순간에는 반드시 소수자가 된다. 어쩌면 생의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젊거나 늙거나 어리다. 우리는 여자이거나 남자이거나 또 다른 성별일 수 있다. 우리는 선택할 수 없었지만 어떤 국가의 어떤 지역에서 어떤 민족으로 태어나, 어떤 피부색을 가지고 어떤 언어를 쓰며 살아간다. 국적을 든든한 울타리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신체를 가졌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장애인이며, 장애인이 아닌 누군가도 언제든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 또한 언제든 다치거나 아플 수 있다. 우리는 혼자 살거나 누군가와 함께 산다. 우리는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않는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임신과 출산을 겪는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믿는다. 종교를 가질 수 있다. 각자의 사상과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자일 수 있다. 우리들 중 누군가는 정규직이고 누군가는 비정규직이며 다양한 형태로 고용된다. 누군가는 교육받을 기회가 충분했고 누군가에겐 그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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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소를 먹지 않는 시민 소의 해를 살아가며 질문한다. 한국인은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소를 많이 먹게 되었을까? 이 질문에 풍성한 대답을 해준 곳은 동물권 잡지 ‘물결’이다. 두루미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물결’은 이번 봄호에 소를 특별 주제로 다루며 식용우를 둘러싼 시스템과 태도를 다각적으로 탐구하는 글들을 선보인다. 그중 하나인 동물해방물결 이지연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한국 소 축산업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축산업은 무역협정, 정부 정책, 기업에 의해 빠르게 대규모로 확산되어 왔다. 1967년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에 가입한 뒤 한국은 미국 거대 곡물 기업이 생산한 잉여농산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싼값에 들여온 그것들을 소진하기 위해 국내 사료산업이 생겨났다. 잉여농산물이란 대두와 옥수수다. 대부분 축산농가가 동물에게 먹이는 사료로 쓰인다. 미국이 과잉 생산한 곡물을 소진하기 위해 만든 사료산업 때문에 축산업도 함께 커졌다. 1968년 박정희 정권의 ‘축산진흥 4개년 계획’ 또한 소를 본격적으로 먹게 된 흐름에 일조한다. 이 역사에서 가장 큰 혜택을 누린 곳은 기업이다. 하림, 카길, 제일제당, 대한사료 등 사료 업체는 사료부터 시작해 동물 품종 개량, 사육, 육류 가공 및 유통 등 전 영역을 아루르는 곡물·축산 복합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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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이토록 구체적인 가축 동물 동물이 무엇인지 배우며 살아가고 있다. 오랫동안 나에게 동물은 강아지나 고양이나 길가의 비둘기였다. 혹은 영상 속 사자나 돌고래였다. 한편 치킨과 삼겹살과 사골 국밥이 동물이라는 것은 잘 실감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제품에 가깝게 느껴졌다. 양념된 닭다리살을 뜯을 때 닭의 구체적인 생애가 상상되지는 않았다.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삼겹살을 볼 때 구체적인 돼지가 그려지지도 않았다. 사골 국물을 마시며 구체적인 소를 떠올리기란 더욱 어려웠다. 고기가 동물임을 실감하게 된 건 전염병 때문이었다. 코로나보다 더 먼저, 더 자주, 더 거대한 규모로 축산업을 휩쓴 전염병들이 있었다. 조류독감, 구제역, 아프리카돼지열병 등이었다. 전염병이란 어마어마하게 많은 동물의 살처분을 의미했다. 살처분이라는 단어가 기사에 적혀 있을 때에는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날마다 언론을 채우는 숱한 난리 중 하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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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식습관이 날씨를 바꾼다 봄이 되었고 나는 모르는 얼굴들이 앉아 있는 교실로 들어간다. 글쓰기 수업 개강일이다.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 본다. 누군가는 그들을 기후 세대라고 부른다. 다가올 기후 재난에 본격적인 피해를 입을 세대라고 예측해서다. 그것은 물론 내 인생과도 너무나 유관한 문제다. 처음 보는 10대들에게 나를 소개한다. 중요한 이야기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글쓰기는 디스토피아를 극복할 수단 중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물론이다. 나는 비밀 병기를 장전해주는 심정으로 미래 세대와의 글쓰기 수업을 시작한다. 10대들은 투명 칸막이 패널 사이에서 마스크를 쓴 채로 피드백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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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시간과 물, 그리고 할머니에 대하여 친척들을 만나지 않은 채로 명절이 지나갔다. 연휴 내내 미세 먼지가 많았어도 춥지는 않았다. 나의 외할머니 이존자씨라면 충청도 사투리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가. 날이 푹햐.” 존자씨 때문에 나는 어려서부터 ‘푹하다’라는 말이 좋았다. 겨울날이 퍽 따뜻할 때 푹하다고 소리내어 말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그 말을 얼굴 보고 들을 수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다 같이 모이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존자씨는 살다 살다 이런 세상은 처음이라며 탄식했다. “입을 아주 틀어막는 세상이자녀.” 그게 마스크에 대한 이야기임을 한발 늦게 알아듣고 나는 막 웃었다. “울애기, 많이 웃어.” 그는 아직도 나를 ‘아가’ 혹은 ‘울애기’라고 부른다. 세상은 세상이고 울애기는 참말로 기특하다고, 열심히 살아줘서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1940년대에 태어나 살아가는 그의 눈에 2020년대가 어떻게 보일지 헤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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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동물을 마주하는 얼굴에 대하여 새해부터 조금 더 긴 칼럼 지면이 주어졌다. 이 지면에 ‘날씨와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검정치마의 노래 가사처럼 “나는 날씨 얘기 하나만으로 충분하고 쉽게 편안할 수가 있는 그런 사이를 원했”으나 “마주 앉은 거리는 좁힐 수 없”다. 날씨는 더 이상 편안한 대화 주제가 아니며 우린 마스크를 쓰고도 2m씩 떨어져야 하는 세상에 산 지 1년째다. 얼굴을 가릴수록 더욱 더 얼굴에 대해 쓰고 싶어진다. 반갑고 아름답고 복잡하고 애처로운 얼굴들에 대해. 거기엔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방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얼굴을 가진 우리는 가속화될 기후위기 앞에서 모두 운명공동체다. 날씨의 지배를 받는 지구 생명체 중 특히 유심히 바라본 얼굴들에 대해 다루려 한다. 그 얼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사람으로서 쓸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동물의 얼굴 또한 마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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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부모’ 말고 ‘고아’ 말고 그동안 부모가 있는 세계의 이야기만을 주로 써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는 엄마와 아빠가 당연한 전제처럼 있었다. 부모 때문에 행복하든 불행하든 말이다. 지금은 그 전제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부모라는 말을 쓰기 전에 주춤하며 말을 고친다. 다양한 성별의 보호자, 다양한 형태의 가족, 가족 바깥의 사람도 포함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서다. 언어는 시대와 함께 살아 숨쉬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장혜영 의원이 시작한 ‘#내가이제쓰지않는말들’은 이 시대에 통용된 차별과 배제의 언어를 인지하고 수정하는 프로젝트다. ‘부모’ 역시 이 프로젝트가 고민하는 단어다. 엄마만 있는 경우, 아빠만 있는 경우, 둘 다 없는 경우, 엄마가 여럿이거나 아빠가 여럿인 경우, 보호자의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싶지 않은 경우 등을 예외로 두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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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더 많이 보는 눈 가을이 다 지나가고 종강 시즌이 왔다. 마지막 수업을 하기 위해 교실에 입장하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내년에 다시 만날 아이도 있지만 다시 못 볼 아이도 있다. 우리는 모두가 처음 맞닥뜨린 코로나 시대에 같이 진입한 이들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어수선하게 넘나들며 함께 쩔쩔매본 사이다. 소규모 교실에서 거리를 두고 마주한 아이들의 얼굴은 마스크로 반 넘게 가려져있다. 그래도 나는 그들 얼굴의 아래쪽을 잘 상상할 수 있다. 줌 화면을 통해서도 보았고, 가끔씩 마스크를 내리고 물을 마실 때에도 보았으니까. 마스크를 쓰고 처음 만났던 학기 초에는 표정을 읽을 수 없어 답답했다. 내가 건넨 말에 웃었는지 안 웃었는지, 표정이 굳었는지 안 굳었는지 알 수 없어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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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납작하지 않은 아픔 예전엔 별 생각 없이 썼으나 어느새 숙고하며 쓰게 된 말들을 생각한다. 나에게 그런 말들 중 하나는 투병(鬪病)이다. 투병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도록 도운 사람은 나의 친구 이다울이다. 이다울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정확한 병명이 없는 고통과 증상을 수년 동안 경험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만성 통증과 우울증, 조울증 등의 기분 장애를 관찰하고 글로 쓰는 것은 이다울 작가의 주요한 작업 중 하나다. 그는 2018년부터 ‘등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자기 몸 안팎의 세계를 기록해왔다. 원인 모를 통증을 껴안은 채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생각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그 기록 속의 문장들이 낯설고 소중하여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전 그런 마음으로 ‘등의 일기’ 연재를 사람들에게 홍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다울 작가가 투병 과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고. 그러자 이다울 작가는 나의 표현을 부드럽고 확실하게 정정해주었다. 자신은 투병이 아니라 치병을 하고 있다고.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병을 다스리는 것에 가깝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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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만날 수 없을 땐 느낌이 중요해 가을마다 나는 교실의 창문들을 활짝 열어놓고 글쓰기 수업을 했다. 가을바람 냄새는 봄바람과 어떻게 다른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늘하고 건조하고 낭만적인 그 냄새를 맡으며 아이들과 근황을 주고받았다. 가을에는 왠지 연애를 시작한 아이들이 많았다. 20분쯤 일찍 끝내주기도 했다. 교실에서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름다운 오후가 지나가고 있었다. 올해 가을도 물론 아름답지만 글쓰기 수업의 풍경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 모니터 화면으로 만나기 때문이다. 맨 처음 온라인 수업에서 가장 어색했던 건 잡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이 대부분 음소거 상태로 수업에 참여해서다. 줌은 소리를 내는 사용자의 화면을 크게 비추기 때문에 혹시나 주목을 받을까봐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자신의 집에서 나는 소음이 수업을 방해할까봐 걱정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말하는 사람이 나뿐인 수업이 되었다. 잡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야기의 길이를 조절하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기도 했는데, 음소거 상태로는 그 소중한 청각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두 번째 수업부터는 음소거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10명 이하의 소규모 수업이라 음향 문제 없이 잡소리가 공유되었다. 환절기마다 비염이 도지는 아이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 조심스레 과자를 먹는 아이의 소리, 큭큭대는 소리, 옆방의 강아지가 짖는 소리…. 그것들이 나에게 용기를 주기도 하니까 부디 편하게 소리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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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청각 정보와 함께하는 글 ‘일간 이슬아’ 연재를 하며 구독자로부터 아주 많은 e메일을 받는다. 체력의 한계 때문에 모든 피드백과 요청에 응답할 수는 없으나, 수백 통의 메일 목록에서도 특히 중요한 이야기는 놓치지 않고 알아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시각장애인 구독자인 김 선생님의 이야기다. 2018년 겨울. 김 선생님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시각장애인 독자가 내 글을 듣는 속도에 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김 선생님은 일반적인 컴퓨터에 ‘센스리더’라는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서 쓰신다. 화면을 음성 언어로 변환하는 프로그램이다. 변환된 나의 글을 샘플로 보내주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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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기후위기와 탈육식 지구물리학자 호프 자런의 신간 제목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국내 출간을 앞두고 사전 연재 중인 책이다.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서 지난 50년간 인간이 누린 풍요가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다룬다. 땅과 바다와 하늘을 망쳐놓은 인류의 식생활과 소비생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구는 앞으로 더 빠르게 달라질 테고 우리는 결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풍요로울 수 없을 것이다. 호우가 계속되고 있다. 기후위기 전북비상행동은 ‘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라고 말하며 온라인 피케팅 운동을 시작했다. 기후위기는 더 이상 먼 대륙의 북극곰 이야기가 아니다. 코앞에 닥친 미래를 바꿔놓을, 이미 시작된 재난 이야기다. 우리의 보금자리에서 점점 심각해질 기후재난의 속도와 강도를 최대한 늦추고 약화시킬 수 있도록 애써야 한다. 2050년을 목표로 장기 저탄소 발전 전략을 지향하는 것은 전 세계적 추세다. 한국 정부도 이에 맞춰 그린 뉴딜 정책을 발표했으나 여전히 석탄발전소 건설을 계획한다는 점, 탄소 배출 제로 목표가 포함되지 않은 점,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미미하다는 점 등에서 지극히 산업중심적이고 성장중심적 정책이라는 여론이 있다. 강한 의지와 섬세한 시선으로 기후 환경 정책을 이끄는 정치인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