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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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그리움으로 해내는 일들 이 나라에서 내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움으로 무얼 하는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를 가슴에 품은 채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랑하는 친구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미 수술실에 들어간 터라 친구 휴대폰의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전화기가 켜지기만을 기다리며 친구의 부드러운 밤색 피부를 떠올렸다. 뒷산을 성큼성큼 오르는 두 다리와 자주 엉키는 머리카락과 툭 치면 흘러나오는 숱한 문장들도 떠올렸다. 그는 아주 많은 책을 외우고 있었다. 친구의 사라짐은 도서관의 사라짐이고 어떤 대화의 멸종이고 다시는 만질 수 없는 살갗일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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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기후위기 시대에 마음을 돌본다는 것 어떤 날엔 쉬이 잠에 들지 못한다. 너무 많은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앞날을 그리다 보면 그렇게 된다. 몇년 후, 혹은 몇십년 후가 두려운 건 내 삶의 필수 조건들이 나빠질 게 분명해서다. 홀로세를 지나 인류세로 접어들어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의 생태적 운명을 콧노래하며 낙관하기란 어렵다. 나에게 미래란 기후위기와 떼어놓을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런 밤엔 나처럼 잠 못 들고 있을 것만 같은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프랑스 서점 매대에서 저널리스트 로르 누알라의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생각했다. 뒤척이는 친구들과 나의 손에 이 책을 쥐여주고 싶다고. 서둘러 판권을 구입한 뒤 번역 출간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 만들어보는 외서였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이 <지구 걱정에 잠 못 드는 이들에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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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누가 책 만드는 사람들을 밀어내는가 서점에서 몰래 독자를 기다려본 적이 있다. 내가 쓴 소설이 놓인 매대 옆을 서성거리면서 말이다. 주말의 대형 서점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으나 내 책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다가오다가 금세 멀어져버리는 이들을 응시하다 보니 동공이 자꾸 흔들렸다. 책은 조용히 기다리는 운명을 지녔음을 그날 이해했다. 읽힐 때까지. 만날 때까지. 그러나 마침내 독자가 나타난다면 책은 결코 한 사람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난 9년을 작가로, 5년을 출판사 대표로 지냈다. 여전히 서툴지만 출판 생태계에 관해 부단히 배우고 있다. 출판은 독자를 향해 헤엄치는 일이다. 독자란 다른 이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이자 책과 함께 고독해지고 충만해지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최대한 좋은 것을 바치고 싶은 기술자들이 출판계에서 일한다. 종이책 독자가 급감했다는, 출판은 이미 저물어가는 산업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해진 지도 10년이 넘었건만 나는 비관할 수가 없다. 그러기엔 훌륭한 출판인들과 훌륭한 독자들이 셀 수 없이 많다. 물론 쓰려는 사람은 많아지고 읽으려는 사람은 적어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현상은 희망적이기도 하다. 쓰는 사람은 읽을 수밖에 없으므로. 읽지 않고 좋은 글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나는 열렬한 독자였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다. 쓰면 쓸수록 독자의 존재가 사무치게 귀해졌다. 그 마음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으로도 자연스레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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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인생을 펼쳐서 보여줄 수 있다면 다음 문장에는 빈칸이 있다. ‘나의 ○○○ 이야기’. 당신이라면 무엇을 채워 넣을까? 빈칸에 들어갈 단어의 조건은 이렇다. ‘끔찍이 싫었지만 끌어안은 것. 나를 나로 만든 내 인생의 한가운데.’ 이것은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제작한 ‘나의 ○○○’ 시리즈 설명 중 일부다. 곱씹을수록 위 두 문장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싫어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인 까다로운 일들이 모두의 삶에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진실을 길어올리게 되는 빈칸. 그곳에 ‘이동권’을 채워넣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인생은 이동권이라는 말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동이 딱히 시련이었던 적 없는 자는 죽을 때까지 모를 일들을 그 사람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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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당신과 다시 싸우기 위하여 격투 경기에는 늘 패자가 있다. 아니라면 승자도 없을 것이다. 승자에게만 마이크를 쥐여주는 대회를 나는 보지 않는다. 격투기의 본질은 때때로 패자의 인터뷰에서 더욱 생생히 읽힌다. 1년 전 국제격투기 대회인 UFC에서 볼카노프스키에게 패배한 정찬성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고. 나는 챔피언이 될 수 없다고 느낀다고.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면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몸은 피와 땀과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세계적인 파이터도 어떤 싸움 뒤에는 그토록 정직하게 약해진다. 그러나 정찬성의 흔들리는 동공을 나는 용감무쌍한 자의 눈빛으로 기억한다. 고통의 깊숙한 안쪽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며 수련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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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어떤 선수는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다 ‘뒤얽히다’라는 동사를 종합격투기 경기장에서 배운다. 케이지는 선수들의 팔다리, 손목과 발목, 팔꿈치와 무릎 관절이 뒤얽히는 장소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선망 혹은 앙금, 이해관계, 훈련의 역사가 뒤얽힌다. 시계방향으로 자라는 등나무와 반시계방향으로 자라는 칡나무처럼 두 선수는 시합의 형식 안에서만큼은 상생할 수 없다.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를 나란히 놓으면 ‘갈등’이 된다. 충돌과 뒤얽힘이 격투기의 본질일 것이다. 그것은 우발적인 싸움이 아니다. 오랜 시간 상대와 자기 자신을 연구하며 정진해온 자들의 스포츠다. 격투기라는 기예, 그중에서도 서로 다른 무술을 섞어가며 겨룰 수 있게끔 룰을 고안한 종합격투기(MMA)는 풍부한 텍스트를 지녔다. 선수들이 비언어로 움직이는데도 경기를 다 본 내 마음엔 수많은 문장이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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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탈석탄과 탈축산을 함께 말하는 이유 서로 다른 운동이 만나는 순간을 눈여겨보려 한다. 장애해방과 동물해방을 함께 떠올리게 만든 책은 <짐을 끄는 짐승들>이었다. 이 책의 작가 슈나우라 테일러는 질문한다.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물산업 곳곳에 장애를 가진 몸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또한 동물의 몸이 오늘날 미국에서 장애를 가진 몸과 마음이 억압당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언뜻 멀게 느껴지는 두 개의 다른 해방을 따로따로 생각하지 않는 이야기가 한국에서도 쓰이는 중이다. 비장애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가 닮아 있고 뒤엉켜 있음을, 두 전선의 시급함과 중대함에 관해서 섣불리 우열을 가릴 필요가 없음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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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태양처럼 가릴 수 없는 말들 특정 단어를 언급하지 않고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어린이들에게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골라달라고 요청했다. 어린이들은 주섬주섬 자기 취향의 이미지를 들고 왔다. 사람일 수도 있었고 동물일 수도 있었고 물건일 수도 있었다. 어떤 사진을 골랐는지 서로 보여주지 않는 게 규칙이었다. 지금부터 그것에 대해 써보자고 제안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존 버거의 책 <글로 쓴 사진>과 비슷한 서술 방식을 연습하려는 의도였다. 글을 완성시킨 열두 살의 서영이가 사진을 가린 채 자기 문장을 읽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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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소의 해방일지 이따금 친구들의 삶을 생각하면 강한 햇볕이 정수리 위로 쏟아질 때처럼 어지럽다. 얼마나 찬란하거나 눈부신지 알아채는 건 나중 일이다. 우선 나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놀라기 바쁘다. 너희 정말 이걸 해냈다고? 그럼 친구들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듯이 웃는다. 그들의 삶은 직접 택한 고생들로 가득 차 있다. 친구 중 한 명은 편집자인데 허구한 날 서울과 강원도를 오간다. 전화를 걸면 인제군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졸다가 받곤 하는 것이다. 거기엔 소들이 있다고 한다. 친구를 비롯한 ‘동물해방물결’의 활동가들이 구조한 소들이다. 소를 왜 구조하느냐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소가 도랑에 빠지기라도 했나? 혹은 작년 여름처럼 홍수를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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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슬픔을 모르는 수장들 국정감사와 함께 가을이 지나가고 있다. 국정감사는 매년 국회의원들이 정부 부처와 기관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국정을 수행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자리다. 국감의 대화는 일상적이거나 직관적이지 않다. 일반 시민들이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 용어와 통계 자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시정된 것들이 우리 일상을 쥐락펴락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므로 시간 내서 국감 영상을 챙겨본다. 우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절박한 문제들이 테이블 위에 오른다. 국정감사 영상에서 내가 감지하는 것은 일종의 매너리즘이다. 날 선 어조로 공수를 주고받기는 하나 그들은 이런 자리에 익숙해보인다. 대부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채로 길고 긴 문답을 이어간다. 그것을 이성과 평정심 혹은 프로 의식이라는 말로 일축할 수 있다면 나도 좋겠다.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시각 국감에 모여앉은 저 어른들에게 떠오르는 풍경이 있을까? 텍스트와 숫자 말고, 얼굴과 장면 말이다. 어떤 정책을 거론할 때마다 가슴을 아프게 하는, 단어마다 자꾸 걸려넘어지게 하는 누군가가 그들 마음속에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들이 내뱉는 문장은 지금보다 생생하게 뛸 것이다. 나는 ‘진짜 질문’과 ‘진짜 대답’을 그리워하며 국회방송을 시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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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여자를 집으로 데려오는 여자들 힘든 일 생기면 우리집에 오라고 말하던 언니들이 있었다. 나는 10대 혹은 20대였고 집이 없었고 있더라도 너무 남루했고 어떤 밤에는 정말로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언니들 집에 찾아가면 밥을 해주거나 시켜서 줬다. 내 얘기를 들어주고 언니들 얘기를 들려줬다. 자고 가라며 이부자리를 펴주기도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한다. 그때 언니들 되게 바빴을 텐데 어떻게 시간 냈을까. 언니들도 가난했는데 왜 가진 걸 나눠줬을까. 그저 나보다 조금 덜 가난했을 뿐인데. 이제는 30대가 된 내가 주위 여자들에게 말한다. 사는 거 너무 힘들면 우리집에 오라고. 그럼 폭력을 겪거나 이혼을 겪거나 고립을 겪거나 자기 자신을 겪다가 탈진한 친구들이 내 소파에 누워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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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내가 가장 응원하는 주인공들 당신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나열해 보겠다. 당신은 무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당신의 가족과 나라가 얼마나 가난한지. 당신이 번 돈 중 얼마를 원가족에게 송금하는지. 어떤 사람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 반말로 말을 건다. 당신은 새 가족에 편입되면서 원래 가지고 있던 이름을 잃는다. 당신은 낯선 기후와 낯선 음식에 적응해야 한다. 낯선 한국어에 적응하는 일에 비하면 그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짐을 푼 곳에서 당신의 모국어는 배제된다. 당신은 며느리가 되고 높은 확률로 엄마가 된다. 아이는 주로 한국어만을 배운다. 집 안에서든 집 밖에서든 당신 빼고 모두 한국어를 쓰기 때문이다. 당신은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에 대해. 이 나라와 저 나라에 대해. 그리고 삶이라는 것에 대해. 더 잘 말해주고 싶은데 그러기가 어렵다. 주양육자임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건 당신의 커다란 슬픔 중 하나다. 당신은 노동한다. 집 안팎에서 장시간 고강도로 일하지만 당신이 가정의 경제권을 쥐거나 재산을 모을 확률은 희박하다. 당신은 둘 중 한 명꼴로 가정폭력을 겪는다. 폭력 뒤에 남편이 하는 말 중 하나는 이것이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