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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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우리는 쿠팡노동자의 친구다 덥다는 말을 예전엔 별 생각 없이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너무 많은 얼굴이 떠오르고 만다. 뙤약볕에서 농사 지어 작물을 보내주는 외할머니. 트럭 몰고 다니며 사시사철 야외에서 일했던 아빠. 여름에 더 많이 소비되는 축산 현장의 닭들, 폭염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가는 기후난민들…. 내 더위의 무게와 그들 더위의 무게는 다르다. 더위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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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눈 밝은 어느 독자를 생각하며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이야기 같은 거 되게 싫어한다고 성은씨는 말했다. 그 말은 시각장애인인 성은씨와 친구들 사이에서 농담거리가 된다. “마음의 눈으로 보지 그래?” 그들은 서로를 놀리고 웃는다. 성은씨는 앞도 뒤도 위아래도 볼 수 없지만 눈이 어둡다는 표현은 그에게 적절하지 않다. 성은씨의 세계는 오히려 사방이 환한 느낌에 더 가깝다. 그는 형광등처럼 하얗게 밝은 시야 속에서 살며 밤에도 불을 켜지 않고 집 안을 거닌다. 그에게 빛이란 소용없는 무엇이다. 하지만 전맹인으로 살아가는 성은씨도 매일의 날씨를 알아차리고 대화를 건넨다. “오늘은 피부에 볕이 많이 닿네요.” “오늘은 날이 흐리네요. 바람도 축축하고요.” 그건 날씨를 만지며 감각하는 사람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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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그는 굶어가며 무엇을 말하는가 이 지면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칼럼을 쓴 지 4주가 지났다. 원고 마감이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당도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듯했다. 그동안 단식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농성은 계속되고 있다. 그곳을 지키는 활동가 미류가 밥을 굶은 지 42일이 지났다. 미류와 함께했던 이종걸은 39일 만에 의료진의 강권으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다른 곳에서 노동권을 위해 단식하던 제빵기사 임종린은 단식 53일 만에 병원으로 실려갔다. 내가 먹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다 그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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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저항하는 몸들을 보라 이 찬란한 봄, 밥알을 씹어 삼킬 때마다 떠오르는 두 얼굴이 있다. 미류와 이종걸이다. 그들이 국회 앞에서 단식 투쟁을 한 지 15일째다. 실제로 만난 적 없어도 그들의 단식이 나와 상관있다는 걸 안다. 당신과도 상관있을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이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과 무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은 소수자 우대법이 아니다. 선택할 수 없는 조건으로 태어나서 살아가다 죽는 생애 주기의 순리대로라면 모두가 한 번 이상 겪게 될 정체성을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법이다. 그 법이 아직 없어서 누군가는 곡기를 끊는다. 생사만큼이나 중대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수한 시민의 절박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법 제정은 거대 양당의 방치 속에 차일피일 미뤄져왔다. 국회가 미루는 걸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어서 움직이는 이들이 있다. 미류와 이종걸의 ‘차별금지법 4월 내 제정 촉구 무기한 단식 농성’도 그런 움직임이다. 두렵지 않아서가 아니라 두려워서 자신의 삶을 건다고, 단식을 시작하며 미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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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산불이 지나간 뒤에 무엇을 꿈꿀까 200시간 넘게 불타는 산을 보며 김소연의 시 ‘실패의 장소’를 생각했다. 그 시의 마지막 문단은 이렇게 끝난다. “같은 악몽을 사이좋게 꾸던/ 같은 꿈을 사이좋게 버리던.” 불이 번지는 며칠 사이 여럿이서 비슷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비슷한 희망이 버려지는 것 같았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우리들의 사이는 좋을 수 있을까? 기후위기 시대의 산이라는 실패한 장소에서 우리가 재정비해야 할 관계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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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치킨은 결코 미담일 수 없다 이 땅에 만연한 것 중 하나는 치킨이다. 치킨은 온갖 미담 속에 등장한다. 인자한 사장님의 선물처럼, 퇴근 후의 쾌락처럼, 고생에 대한 보상처럼 통용된다. 그것을 배달시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로 도처에 흔하다. 한국에서의 삶은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매일 치킨을 마주치는 일상을 포함한다. 치킨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가장 많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빅데이터에서 자주 집계되는 검색어에 ‘치킨’이 상위 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치킨에 관해 과열된 분위기가 이 사회 전반에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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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수어, 이토록 시각적인 노래 손으로 노래를 그리는 사람을 본다. 그들은 손가락과 손등과 손바닥으로, 콧잔등과 입술과 볼과 눈썹으로 노래를 옮긴다. 수어 통역사들이 해내는 일들 중 하나일 것이다. 얼마 전 수어통역사와 나란히 무대에 섰다. 그날 내가 소리 내어 부른 노래 가사는 이것이다.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이때 수어통역사님은 내 오른편에 서 계셨다.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내가 노래하자마자 그가 물 흐르듯 양손 검지를 흐르게 하더니 두 손바닥을 잠시 부르르 떨고선 두렵지 않다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이라고 내가 노래하자마자, 그가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턱끝에 살짝 톡톡 친 뒤 뭔가를 잃는 사람이 상심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아까처럼 양손을 다시 부르르 떨고선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장혜영 국회의원의 지난 의정보고회에서의 무대였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동안에는 관객들을 바라보느라 그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볼 수가 없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유튜브에 업로드된 영상을 보고 나서야 그가 나와 함께 노래하고 있었음을, 어쩌면 나보다 더한 노래를 그가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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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깊게 듣는 사람 “너도 들었어?” 이것은 앞으로도 반복하고 싶은 말들 중 하나다. 나에게 이 말을 처음 건넨 건 정혜윤이다. 그의 책 <마술 라디오>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방송을 하다가 너무 좋은 말이 나오면 후배를 바라봐. 그리고 이렇게 물어봐. “너도 들었어?” 그럼 후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그때는 정말 그것으로 족해. 그럴 수 있기를 바라. 아주 깊게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들을 수만 있다면, 아주 깊게 말할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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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철새들이 무사히 지나가게 하자 철새가 지나가는 계절이다. 파주에서 살 때는 이즈음 하늘을 가로지르는 철새 무리를 날마다 볼 수 있었다. 부지런히 맨 처음으로 출발한 무리를 보며 계절이 바뀌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고 어제의 철새와 오늘의 철새가 어떻게 다르게 울며 지나갔는지도 기억할 수 있었다. 매일 봐도 감탄스러운 비행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들의 천재성>이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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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우리 부디 서로를 돕자 <향모를 땋으며>는 벽돌만큼 두껍지만 계속해서 읽고 싶은 책이다. 식물생태학자인 로빈 윌 키머러가 썼다. 왁자한 탄생 신화와 함께 이 책은 시작된다. 여러 종의 동물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바람과 물과 진흙을 나르는 것이다. 결코 순조롭지 않은 과정인데 어찌어찌 방법을 찾아내는 이들을 보고 있자면 귀엽고 짠하고 감탄스럽다. 마침 같은 대목을 읽고 있던 친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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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비건의 절망과 희망에 대하여 나는 시를 쓰지 않지만 지난여름 펼쳐든 새 시집에서는 꼭 내가 쓴 듯한 문장을 읽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다른 우주에서 시인이 된 훌륭한 버전의 내가 쓴 것만 같은 문장이었다. 강지이 시인의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에 실린 글이다. “여름 샐러드를 먹으면서/ 흰 눈이 쌓인 운동장을 함께 달리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고, 또 있었더라도/ 우린 앞으로 잘 달릴 수 있다./ 그런 믿음은 이상하게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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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의 날씨와 얼굴 ‘한 명’의 동물을 생각한다 돼지 한 마리가 죽었다, 라고 쓴 뒤 지우고선 이렇게 다시 써본다. 돼지 한 명이 죽었다. 그러자 문장 속 죽음은 내 안에서 더 크게 덜컹이는 사건이 된다. 두 개의 문장이 당신에게도 다르게 읽힐지 알고 싶다. ‘명’은 주로 사람의 수를 셀 때에만 사용되어 왔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마리’는 ‘짐승이나 물고기, 벌레 따위를 세는 단위’다. 언어 바깥에서나 언어 안에서나 비인간 동물은 인간 동물보다 덜 중대한 존재로 대해진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역사다. 나는 지혜로운 친구들의 말과 글을 따라가다가 이 역사와 이 언어가 몹시 기구하게 느껴졌다. ‘마리’라는 언어를 명예롭게 할지 아니면 모든 종에게 ‘명’을 붙일지에 관한 고민은 앞으로도 계속되겠으나 고민을 진행하는 동안에도 새롭게 말해보고 싶었다. 한 마리씩 말고 한 명씩 세면서 글을 쓰고 싶었다. 한 명의 돼지. 한 명의 소. 한 명의 닭. 지금 써내려가고 있는 이 지면에서도 동물의 수를 언급할 때 ‘마리’ 대신 ‘명’이라고 표기하곤 했다. 물론 편집부 선생님들과의 교정 과정에서 금세 ‘마리’로 고쳐졌다. 표준적인 언어에 대한 합의를 철저히 지키는 신문사의 특성상 하루아침에 새로운 규칙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으셨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나 시대와 함께 계속해서 갱신되는 것이 언어이기도 하다. 표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천히 새로워진다. 여러 동물권 단체를 중심으로 이미 다양한 말들이 새롭게 정리되고 있다. 새삼스럽게 살펴볼수록 일상 속 많은 언어가 종차별적이어서다. 이 귀한 지면을 통해 동물을 둘러싼 언어를 다시 합의해볼 가능성을 탐구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