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인 타인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글쓰기 교사

어느 날 초등부 글쓰기 수업을 마치며 나는 칠판에 숙제를 적었다. 숙제의 글감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어떤 면모를 좋거나 나쁘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는지 질문하는 글감이었다. 일주일 뒤 아이들은 숙제를 제출했다. 아홉 살의 이안이는 자신의 친구 제하를 좋은 놈이라고 말하며 이렇게 썼다. “제하는 필요한 게 있으면 빌려주고 칭찬을 잘 해준다.” 반면 나쁜 놈으로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악당 볼드모트를 골랐다. “그는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고통을 준다.” 이상한 놈으로는 에릭이라는 인물을 골랐다. 이안이가 좋아하는 책 <조지의 우주를 여는 비밀 열쇠>에 등장하는 천재 과학자다. 이안이가 쓰길 “내가 생각하는 이상한 놈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물었다. “보통 사람이란 무엇일까? 다르다는 게 꼭 이상한 것일까?” 이안이가 대답했다. “엄청 심하게 다르면 이상해요. 예를 들어 우주에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을 만큼 다른 사람 있잖아요.” 그는 다시 책에 눈을 돌리고 에릭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이안이에게 에릭은 달라서 싫은 사람이 아니고 달라서 매혹적인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그 다름에 ‘이상한’보다 더 좋은 형용사를 붙일 수 있게 될 것이다.

[직설]입체적인 타인들

한편 아홉 살의 이와는 요즘 심취해서 읽고 있는 어린이용 그리스 로마 신화 책의 캐릭터들에 관해 썼다. 좋은 놈으로는 헤스티아 신을 꼽고, 나쁜 놈으로는 아폴론 신을 꼽으며 이렇게 썼다. “아폴론은 동생 아르테미스가 사랑하는 오리온을 직접 죽이게 했다.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그건 아닌 것 같다.”

이와가 신화 속 캐릭터에 집중할 때 열두 살 서현이는 동시대 뉴스 속 사람들을 원고지에 데려왔다. “좋은 놈은 지금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더 퍼뜨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너무 고맙다. 자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도 있지만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그렇다. 나쁜 놈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다. 코로나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상한 놈은 코로나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조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조금만 노력해서 코로나가 끝나면 다 같이 편하게 지낼 텐데 지금 자신이 불편하고 힘들다고 마음대로 하다니 정말 이상하다.”

이 숙제는 아이들이 생각하는 선과 악과 도덕 관념을 드러낸다. 숙제 속에서 좋은 놈과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은 다른 부류의 사람들처럼 보인다. 한편 아홉 살 제하는 다르게 접근한다. 제하의 원고지에는 오직 두 명만이 등장하는데 그는 두 사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아빠는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다. 일단 맛있는 온소바를 해줘서 좋은 놈이다. 그런데 내가 잘못했을 땐 버럭 화를 낸다. 그럴 땐 나쁜 놈이다. 그리고 아빠는 자기가 사실 이순신이라면서 장난을 친다. 이상한 놈이다. 좋고, 나쁘고, 이상한 건 엄마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잘해준다. 예를 들면 휴대폰의 ‘Siri’처럼 나한테 설명을 잘해준다. 그럴 땐 좋은 놈이다. 그렇지만 엄마는 나쁜 놈이다. 왜냐하면 나한테 가끔 짜증을 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는 이상할 정도로 이상하지 않다. 나는 그 점이 좋은지 나쁜지 모르겠다.”

제하는 형용사에 따라 여러 사람을 분류하는 대신 한 사람 안에 공존하는 여러 형용사를 짚어낸다. 부모란 좋았다가도 나빴다가도 이상한 대상이라고 묘사하며, 내가 내준 글감을 창의적으로 버무린다. 제하의 글에서 아빠와 엄마는 앞면과 옆면과 뒷면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이다. 제하는 아는 듯하다. 좋기만 하거나 나쁘기만 하거나 이상하기만 한 사람은 없다는 걸. 다들 좋은 놈과 나쁜 놈과 이상한 놈을 자기 안에 데리고 살아가고 있다는 걸. 변화무쌍하며 결코 고정적일 수 없는 그들을 설명하려면 ‘좋은, 나쁜, 이상한’보다 더 세세하고 정확한 분류가 필요할 것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우리는 풍부한 사람을 위한 풍부한 언어를 찾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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