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 무정도 유정도 아닌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당신이 잘되면 좋겠습니다>라는 책을 쓴 이후 북토크에서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고 항상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김민섭 사회문화평론가

선함은 유약함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긴 어린 시절부터 힘이 약한 아이들은 무언가를 잘 빼앗긴다. 싫다고 할 때마다 듣게 되는 말이 “너는 착하니까 괜찮잖아” 하는 것이다. 어른이 된 지금에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것 좀 해줘요’ 하는 부당한 요구를 하고는 실망하는 누군가들이 있다. 그러나 선한 사람만큼 단단하고 강인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들만큼 치열하게 분투해 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얼마 전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를 봤다. 주인공 부부는 미국에서 세탁소를 한다. 남자는 내향적이고 유약한 성격으로 보인다. 항상 사과하고 중재하고 괜찮다고 말한다. 손님이 맡긴 세탁물에 눈알을 붙여두고는 귀엽다고 웃기도 한다. 여자는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들은 어떤 일에 휘말려 한 우주를 구원하기 위한, 사실은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여러 우주에 존재하는 다른 자신의 힘을 빌려와 계속 싸워야 한다. 그때 남편은 말한다. “여보, 나에게는 내 싸움의 방식이 있어”라고. 나에게는 이 대사가, 올해의 대사라고, 아니 한 시절의 대사라고 할 만했다. 그는 현실을 회피하며 적당히 살아온 것처럼도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워온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분노의 감정을 보내는 일은 쉽다. 화내고 목소리를 높이고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건 사실 가장 간편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눌러 담고 타인을 끌어안는 데서부터 자신의 싸움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정함’, 이것은 단단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덕성이다. 흔히 말하는 ‘유약함’과는 가장 반대에 있는 단어가 되어야 한다.

나는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 얄궂게도 1910년대에 발표된 장편소설 <무정>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저자 이광수는 <유정>이라는 소설도 썼다. 사실 그만큼 무정히 시대를 살아갔던, 아니 민족에도 무정했던 이도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정이라는 것은 어느 한 대상을 향해 있거나 없거나 해야 하는 감각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사실 우리가 아는 많은 작가들이 그러한 무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작가도 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어느 시인은, 약한 모든 것에 연민을 가졌고, 그것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했고, 그러면서도 무정한 한 시대를 자신의 방식으로 걸어가고자 했다.

윤동주는 모든 존재에 자신의 정을 보냈다. 잘 드러나지 않는 모든 약한 존재에게는 더욱 그랬고, 인간이 아닌 것에 이르러서도 그랬다. 그의 삶이란 다정함으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시적 표현이었겠으나 나는 그가 흔들리는 잎새를 보며 실로 가슴 아파했을 것으로 믿는다. 흔한 잎새에서 민족의 아픔을, 무엇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함께 떠올린 그의 다정함은, 그 어두운 제국의 시대에서 얼마나 용감한 것인가.

다시 영화로 돌아와, 여자 주인공은 남자의 다정함에 감화된다. 그리고 그와 닮은 싸움을 시작한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건네고, 그를 끝내 안아주는 방식으로 이전보다 더욱 강한 사람이 된다.

‘다정함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말은 공허하지도 않고 유약한 사람들의 전유물도 아니다. 지금 이 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존경을 보낸다. 세상이 규정한 연약한 선함의 모습은 사실 없다. 당신의 삶의 방향은 잘못되지 않았으니까, 어디선가 같이 걷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길 바란다. 무정도 유정도 아닌 다정을 기억하면서 지금처럼 용기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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