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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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군더더기 판결 “대저, 계약과 규범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법언과 스스로의 잘못으로 돌릴 수 없는 작은 허물조차도 자신의 도덕적 결함으로 여겨 자책과 은둔을 미덕으로 삼은 우리 선조들의 선비 정신 및 (중략) 확립된 전통과 자유민주주의의 법리가 법의 엄격한 적용을 이끌게 한 이 재판의 바탕이 된 것임을 아울러 천명하며….” 이것은 1979년 9월 서울민사지방법원이 당시의 신민당 총재 김영삼에 대한 직무정지가처분 신청사건에서 내린 결정의 마지막 문장 중 일부다. 전부 인용하기엔 길어서 요지를 추리면 ‘법언(法諺)’ ‘선비 정신’ ‘영국 민주정 등의 전통’ ‘자유민주주의의 법리’가 결정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결정문 전체의 법적 논리는 정연하지만, 이 문장이 문제다. 법언은 그렇다 치고, 선비 정신과 타국의 전통과 자유민주주의의 법리가 왜 민주주의를 외친 야당의 총재를 내치는 법원 결정의 바탕이 되는지 이상하다. 부적절한 것이다. 이 군더더기가 부적절함을 넘어 부당했음은 역사적 사실이 말해준다. 김영삼은 자책하지도 은둔하지도 않고 군사독재에 계속 저항했다. 그해 10월 부마항쟁이 일어나더니 반민주적인 유신체제가 무너졌다. 그는 1993년에 대통령까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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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공수처 제1호 사건’을 보는 답답함 헌법재판소가 1988년 출범했을 때, 그 전신인 헌법위원회의 유명무실함을 보아온 법조계 일각에서는 저 기관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러나 그해 헌재는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제6조 제1항 단서의 위헌 여부가 문제가 된 사건에서 공개변론을 열고 창설 이래 제1호의 위헌 결정을 내렸다. 누가 봐도 위헌이라고 할 만한 법률조항이 문제가 된 사건을 골랐고, 그 심리과정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공개변론에 부쳤다. 민사소송에서 당사자인 국가와 국민을 동등하게 대하라는 선언은, 군사독재에 지쳐 국가주의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시작되던 시대적 상황에서 타이밍도 절묘했다. 헌재의 초대 소장과 재판관들의 혜안과 감각이 돋보인 순간이었다. 이로써 헌재는 일반의 의구심을 불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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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이재용 사면의 정치학 경제 5단체가 지난달 27일 청와대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면을 건의했다. 지방자치단체의 장도 건의 대열에 끼었다. 어느 경제지는 지난달 아예 여론조사까지 했다. 응답률 9.6%인 1008명 중 찬성 69.4%였다고 한다. 여기에 유교와 불교 등 종교계가 가세했다. 사면론의 요지는 ‘반도체 위기’다. 일부 언론의 태도는 점점 강해진다. “나라 위해 기여할 기회를 주자”라던 어느 칼럼의 주장은 사설로 이어지더니 마지막으로 어떤 칼럼은 문재인 대통령의 결단을 바라며 “부디 진영을 넘어 나라를 구하시기 바란다”라고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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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사법농단 사건의 유죄 판결 지난달 23일 사법농단 사건에서 처음으로 직권남용죄에 대해 일부 유죄 판결이 선고되었다. 형법이 정한 직권남용죄의 구성요건은 이렇다. 직권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남용해야 하고, 그 남용으로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해야 한다. 첫째와 둘째의 요건을 합치면 이는 ‘일반적 권한(직무 권한)에 속하는 사항이기는 해도 구체적으로 그 실질은 정당한 권한 외의 행위를 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예를 들면 인사권을 가진 공무원이 자격 없는 사람을 공무원으로 채용해 주는 행위가 직권남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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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법률가의 한계와 정치의 사법화 가족이 병원에 입원하면 담당 의사를 대하는 자세가 예사롭기 어렵다. 보기만 해도 꾸벅, 말 한마디만 들어도 꾸벅, 그저 죄인이라도 된 양 설설 기게 된다. 거짓된 겸손이 아니다. 절박한 마음에 진심으로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다. 의뢰인이 변호사를 대하는 태도도 비슷하다. 그나마 변호사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꿀 수라도 있지만, 판사나 검사 앞에 서게 되면 그럴 자유도 없다. 공권력은 독점적이다. 모든 공권력 앞에서 당장 일을 처리해야 할 입장에 처한 사람들은 우선 권력자에게 쩔쩔매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존숭을 보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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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대법원장의 거짓말 소액사건을 담당하던 판사 시절, 빌려준 돈을 되돌려받지 못했다는 원고의 주장과 그 돈 진즉에 갚았다는 피고의 주장이 맞서는 사건을 만났다. 차용증도 영수증도 없었고, 혹시 누군가에게 돈을 전해달라고 한 것 아닌가 물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고 했다. 생각하다 못해 객기를 부렸다. 그럼 두 사람 중 거짓말한 사람이 천벌을 받아도 좋으냐고 물었다. 원고가 급히 “네, 축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피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족집게도사가 아닌 다음에야 판사 노릇 하기는 정말 어렵다. 판사는 거짓말에 지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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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위안부 손해배상 판결을 보는 시각 ‘국왕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The king can do no wrong)’는 18세기 영국의 법학자 블랙스톤이 <영국법 주해>에 적은 말이다. 국왕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엔 왕권의 신성을 인정하는 인식이 깔려 있다. 민족국가의 발전과 더불어 이 법언은 ‘국왕’이 ‘국가’로 바뀌고 국가행위(act of state)에 대한 면책 주장으로 이어졌다. 영미법계의 이 법리는 국제관습법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주권면제 이론이다. 어느 주권국가의 행위는 그 동의가 없는 한 다른 주권국가의 사법적 심사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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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추·윤 갈등’을 보는 법 ‘추·윤 갈등’을 놓고 백가쟁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어느 쪽이든 지나친 비분강개는 다소 수상하고 문제의 해법도 못 된다. 법적인 시각으로는 이렇다. 법무부 장관의 권한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고 검찰총장의 임기 보장과 징계의 관계는 어떠한가, 징계위가 윤석열 총장의 비위로 인정한 사실은 정당한 징계 사유인가 등이 쟁점이다. 사태를 정치적 시각에서 보면 혼란스럽다. 법무부 장관과 여권이 내세우는 명분은 검찰개혁이고, 심지어 검찰 자체도 말로는 개혁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런데 여권이 무소불위의 검찰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외치면, 검찰은 여권의 속내가 검찰 길들이기라고 반박한다. 검찰이 정치적 중립을 부르짖으면, 여권은 그 실질이 개혁에 대한 저항이며 조직이기주의라고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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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이상한 말, 틀린 말, 막말 연주에 해설을 곁들이는 음악회에서 사회자인 전직 아나운서가 인사말을 한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쁜 것은 맞는데, 와중이라니? 와중(渦中)은 ‘물이 소용돌이치듯 복잡한 일이 벌어진 가운데’라는 뜻이다. 그냥 ‘바쁘신 중에도’라고 했으면 좋았을 게다. 곡 해설이 이어진다. “이제 말러의 교향곡을 들으시겠습니다. 말러는 교향악단을 지휘하면서도 호시탐탐 작곡을 했던 음악가였습니다.” 말러가 호시탐탐(虎視眈眈) 작곡을 하였을 때 그는 정말 호랑이가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보듯 하였을까. 그러다가 사회자는 ‘이율곡씨’의 어머니 신사임당의 자녀 교육 방법을 찬양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 몰라도,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런 지칭법은 아무래도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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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숨 쉴 공간’과 메마른 세계관 열흘 전 이재명 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등 피고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지난 7월 대법원이 선고한 전원합의체 판결 취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그 대법원 판결을 읽다가 ‘숨 쉴 공간’이라는 구절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문장을 옮기면 이렇다. “표현의 자유가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하여는 그 생존에 필요한 숨 쉴 공간, 즉 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중립적인 공간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판결은 다시 어느 보수논객이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부부에게 사용한 ‘종북’ ‘주사파’라는 표현을 두고 2018년 10월에 선고된 다른 전원합의체 판결을 인용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숨 쉴 공간이란 글귀가 등장한다. 2011년 광우병에 관한 <PD수첩> 보도 사건에서 내려진 판결에도 이 용어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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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우리에겐 왜 긴즈버그가 없냐고? 미국 연방대법관 긴즈버그가 타계하자 우리나라의 언론도 일제히 그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그에게 붙여진 ‘진보의 아이콘’이라는 칭호에도 불구하고 보수 성향 언론사들도 관련 기사를 크게 내는 게 좀 신기해 보였는데, 어떤 기사는 연방대법원 청사 앞에 모여든 추모객들의 사진을 실으면서 그 아래에 “우린 왜 이런 대법관이 없나”라고 썼다. 쓴웃음이 나온다. 그 질문이 왜 우리에겐 대중의 열광을 받는 대법관이 없느냐는 것이라면, 그건 무의미하다. 판관은 본디 대중의 열광을 받는 자리가 아니고, 그런 열광이 판관으로서의 가치를 말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라, 여성과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변호사로서 싸우고 대법관으로 일하며 줄곧 그들 편에 섰던 사람, 그가 이끈 전선(戰線)이 넓고 그가 던진 메시지의 울림이 컸던 사람, 그런 긴즈버그가 왜 우리에겐 없는지 묻는 취지라면, 그 질문엔 답을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미국의 대법관이 우리나라 대법관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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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진의 청안백안靑眼白眼 광화문 집회와 사법적 판단 지난 광복절의 광화문 집회는 서울행정법원이 서울시의 집회금지 처분에 집행정지 결정을 내리면서 강행되었다. 해당 재판부 판사의 해임이나 탄핵을 바라는 청와대 국민청원 참여자가 8월30일 기준 33만명을 넘어섰다. 집행정지 사건을 다룬 신문기사의 인터넷 댓글을 보면 판사가 자신의 우파적 성향에 따라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판사가 법대로 내린 결정을 왜 문제 삼느냐는 주장도 보인다. 판사는 아주 내밀한 사이가 아니면 누군가에게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관해 말하는 일이 없다. 대법관 후보자들은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한결같이 “보수도 진보도 아니며 오직 법에 따라 판단할 뿐이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판사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중립해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확정된 사실을 놓고 내리는 판사의 판단이 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결론이 어떤 정치적 성향에 의하여 내려진 것이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또한 쟁송에 나선 당사자들이 제대로 주장을 펴고 증거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판사에게 왜 진실을 밝혀내지 못했느냐고 탓하기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