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석훈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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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검사정권과 경제민주화 군사정권은 개발도상국에서 군인이 상대적으로 교육을 잘 받는 엘리트 집단인 경우 벌어지는 일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특정 직업이 국가를 장악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한국에도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다. 정당성이 문제가 되니, 공작정치와 언론장악이 중요했다. 검사정권이라는 용어가 지금의 한국을 분석하는 데 유효한 개념일까? 단순히 검사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그런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법무부 장관을 하던 한동훈이 집권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된 지금, 생소했던 검사정권이라는 말이 현실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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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진짜 ‘서울의 봄’ 며칠 전에 초등학생인 큰애와 극장에 가서 <서울의 봄>을 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라도 셋업 과정이나 주인공의 고진감래 등 덜 흥미롭거나 때로는 지겨운 장면이 있게 마련이다. <서울의 봄>에는 그런 장면이 거의 없다. 뽀로로 캐릭터를 만들 때, 뭘 더하는 게 아니라 뭘 뺄지가 주된 디자인 포인트였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이태신 부인이 나왔을 때, 그녀의 슬픈 후일담이 좀 나올까 했었는데, 일절 없었다. 큰물이 흘러가는데 걸리적거리는 소위 ‘이물질’이 거의 없는 편집이 기가 막혔다. 장면 전환도 빠르고, 대사들도 길게 안 준다. 생각할 틈이 없이 숨가쁘게 장면들이 전환되었다. 얘기는 ‘올드’하더라도 편집만큼은 모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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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서울, 나눌 것인가 키울 것인가 1991년 한국행정학회의 한국행정학보에는 조일홍의 ‘수도권 자치구역 개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려 있다. 조일홍은 서울의 여러 자치구들이 서울시에서 떨어져 나가고자 하는 욕구가 점점 더 증가할 것이라고 보았다. “자치구가 좀 더 강력한 자치권을 요구하게 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시로의 독립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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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연구개발과 진보 정치 한국은 ‘공업입국’ 정신으로 지금의 나라를 만들었다. 많은 논란에도 박정희의 확실한 공적은 카이스트를 비롯해 공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주변 장치도 같이 만들었다는 점이다. 전후 아무것도 없는 나라에서 기술자를 우대하고, 기술이 모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었다. 한국에서 최초의 인터넷 회선실험을 한 사람은 카이스트 교수였던 전길남이었다. 그는 일본 교포였다.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나사(NASA)에서 일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박정희 정권의 기술 우대 정책 때문이었다. 결국 1982년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전길남의 제자들이 삼보컴퓨터와 넥슨, 엑스엘게임즈(리니지 개발), 아이네트 등을 창업했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한국이 그냥 IT 강국이 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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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마이웨이 대통령과 홍범도 총선 내년 4월에는 총선이 있다. 상원과 하원이 있는 게 아니어서, 지역구든 비례든 한꺼번에 바뀐다. 일본처럼 총리가 수시로 국회를 해산하고 다시 선거를 치르는 것도 아니어서, 한국 총선은 예외 없이 4년마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진행된다. 일부러 그렇게 설계한 것은 아니지만 5년의 대통령 임기와 4년의 국회의원 임기가 묘하게 교차하면서 때때로 중간평가 역할을 하게 된다. 내년 총선은 중간평가 성격이 더 강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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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기재부, 이러다 우리 다 죽어! 윤석열 정부가 못하는 게 많지만 그중에서 제일 못하는 게 예산 관리 아닐까 한다. 제대로 쓰는 돈도 없는데, 세수에 문제가 생겨서 여기저기 칼질하느라고 난리도 아니다. 칼자루를 쥔 기획재정부의 칼질이 전례 없이 투박하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국가 설계 및 운영 전반에 경제만 아는 사람들이 무시무시한 완장질을 하는 중이다. 대통령의 검사 시절 별명이 칼잡이였다더니, 요즘 경제 당국이 칼잡이처럼 예산을 난도질하고 있다. 이번에는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크게 떼돈 버는 일도 아닌 연구·개발(R&D)을 오랫동안 했던 사람들은 단지 정부 연구를 했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카르텔’이 되었다. 앞에서는 예산 당국이 칼질을 하고, 뒤에서는 감사 당국이 몇년 치 영수증을 탈탈 털며 실정법을 들이대고 있다. 만약 어느 엔지니어가 백지에 가까운 영수증을 제출하면서 한동훈 법무부 장관처럼 “잉크가 휘발돼 보이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수년째 진행되던 연구 과제들이 결실을 못 보고 칼질 앞에 휴지 조각이 되고, 새로운 과제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야 하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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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상후하박 경제, 윤석열 경제가 가는 길 조선은 역사에서 매우 길게 버텼던 나라다. 일반적인 경제사의 법칙으로는 설명이 어려울 정도로 경제적으로는 특별한 국가였다. 중세라고 부르는 일반적인 국가의 특징이 조선에는 적용되지 않아서, 분석도 잘 되지 않는다. 지역의 영주가 농노들을 거느리고, 이들의 연합 정권이 왕조를 만드는 게 일반적인 형태다. 농업 노예, 농노가 존재하는 게 이 시스템의 특징인데, 전형적인 신분제 국가였던 조선에는 노비는 존재했지만, 농노는 존재하지 않았다. 주축 생산 인구들의 신분이 상대적으로 높았고, 안정되어 있었다. 그 힘이 조선을 강하게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전형적인 아래쪽에 후하게 해주는 하후상박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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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저출생 시대, 학생 인권과 교권 1970년대 초반에 100만명이 넘었던 출생아 수가 2022년 25만명 수준으로 내려왔다. 합계출산율이 끝을 모르고 내려가는 중이라 지금 추세로 진행되면 20년 후에는 10만명대로 내려갈 가능성이 크다. 한국 경제의 양상도 어쩔 수 없이 변하게 된다. 1960년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시작될 때, 한국은 자본이 희소한 시대였다. 기계나 물자 대신 사람을 대량 투입하는 노동집약형 산업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한국 경제를 만들었다. 사람은 흔했고, 사회는 사람을 막 대했다. 1970년대 초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초등학교 때 오전, 오후로 나눠 2부제 수업을 했다. 사람의 가치가 기계의 가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낮았고, 자본은 높은 이자율만큼 충분히 대접을 받았다. 전세도 이 시기에 제도로서 자리 잡았다. 목돈만 준다면 월세도 필요 없이 집주인은 기꺼이 집을 내주었다. ‘자본 퍼스트’, 자본희소 시대였다. 인권은 없고, 권세는 자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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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알이백’이 뭐죠? 네, ‘시에프백’! 이재명: 지금 그럼 RE100은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이십니까? 윤석열: 네, 다시 한 번. 이재명: RE100. 윤석열: RE100이 뭐죠? 지난 대선 후보 방송 토론회 때의 한 장면이다. 한 명은 묻고 한 명은 못 알아듣는 이런 상황은 이후 토론 내용인 ‘EU택소노미’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상당수 사람은 ‘알이백’이라 부르는 이 용어에 대해 그때 처음 들었을 것 같다.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하다. 영국에 있는 다국적 비영리기구인 클라이밋 그룹은 2014년 재생가능에너지, renewable energy를 100% 사용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민간 캠페인을 시작했다. 재생100 정도로 불러도 무방한데, RE100이라는 단축어로 국내에 소개되면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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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쑨원의 민생, 정치권의 민생 “국민당은 민생주의에 대해 두 가지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권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본의 쏠림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쑨원의 민생주의 설명이다. 중국 국민당을 이끌었던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내세웠다. 흔히 이것을 ‘삼민주의’라고 부른다. 쑨원은 일제에 맞서 공산당과의 적극적 협력을 만들었고, 결국 두 차례에 걸친 국공합작이 있었다. 쑨원의 후계자인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밀려났다. 쑨원 사후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 쑨원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중국인에게 쑨원의 의미는 각별하다. 나중에 쑨원의 부인 송경령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사망 직전 중국 공산당 명예주석이 되었다. 주은래는 그녀를 ‘손부인’이라고 각별히 예우했다. 중국과 대만 모두 쑨원에 대한 일종의 상징 투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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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주 40시간도 길다 지난 겨울방학 때에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 우리 집 두 어린이가 돌봄교실을 따로 하지 않고 주로 집에 있었다. 나중에는 요일이 다 헷갈릴 정도였다. 생전 그런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난 겨울방학은 봄방학과 통합되어 두 달이나 되었다. 그래도 둘 다 기저귀 갈아야 하던 시절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스스로를 달래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해롱해롱하는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전에는 낮에 가끔 사람들하고 차도 마시고 그랬는데, 그것도 일종의 ‘럭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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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초등학생의 미적분 선행학습 천재는 33세 근처에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차르트는 35세에 사망했고, 슈베르트는 그보다 더 빨라서 31세에 죽었다. 쇼팽은 39세에 영면했다. ‘내 사랑 내 곁에’의 가수 김현식은 33세에 사망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린이’라는 단어를 남겨준 소파 방정환 선생도 그 나이에 돌아가셨다. 색동회를 근거로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세계적으로도 아동 인권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도 어린이에게 인권이 있다는 생각을 잘 못했다. 21세기의 한국, 지금은 어떨까? 불행한 일이지만, ‘동반자살’의 비극이 아직도 벌어진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간단한 원칙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거리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