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석훈
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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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알이백’이 뭐죠? 네, ‘시에프백’! 이재명: 지금 그럼 RE100은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이십니까? 윤석열: 네, 다시 한 번. 이재명: RE100. 윤석열: RE100이 뭐죠? 지난 대선 후보 방송 토론회 때의 한 장면이다. 한 명은 묻고 한 명은 못 알아듣는 이런 상황은 이후 토론 내용인 ‘EU택소노미’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상당수 사람은 ‘알이백’이라 부르는 이 용어에 대해 그때 처음 들었을 것 같다.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하다. 영국에 있는 다국적 비영리기구인 클라이밋 그룹은 2014년 재생가능에너지, renewable energy를 100% 사용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민간 캠페인을 시작했다. 재생100 정도로 불러도 무방한데, RE100이라는 단축어로 국내에 소개되면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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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쑨원의 민생, 정치권의 민생 “국민당은 민생주의에 대해 두 가지 방법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지권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며, 두 번째는 자본의 쏠림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쑨원의 민생주의 설명이다. 중국 국민당을 이끌었던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은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를 내세웠다. 흔히 이것을 ‘삼민주의’라고 부른다. 쑨원은 일제에 맞서 공산당과의 적극적 협력을 만들었고, 결국 두 차례에 걸친 국공합작이 있었다. 쑨원의 후계자인 장제스는 결국 대만으로 밀려났다. 쑨원 사후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 쑨원을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그만큼 중국인에게 쑨원의 의미는 각별하다. 나중에 쑨원의 부인 송경령은 중국 공산당 당원이 되었고, 사망 직전 중국 공산당 명예주석이 되었다. 주은래는 그녀를 ‘손부인’이라고 각별히 예우했다. 중국과 대만 모두 쑨원에 대한 일종의 상징 투쟁이 벌어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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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주 40시간도 길다 지난 겨울방학 때에는 너무너무 힘들었다. 초등학교 4학년과 2학년, 우리 집 두 어린이가 돌봄교실을 따로 하지 않고 주로 집에 있었다. 나중에는 요일이 다 헷갈릴 정도였다. 생전 그런 적이 없었다. 게다가 지난 겨울방학은 봄방학과 통합되어 두 달이나 되었다. 그래도 둘 다 기저귀 갈아야 하던 시절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고 스스로를 달래기는 했지만, 그런다고 해롱해롱하는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전에는 낮에 가끔 사람들하고 차도 마시고 그랬는데, 그것도 일종의 ‘럭셔리’였다. 우리 집 어린이들 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되었다. 개학하면 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요일이 왔다갔다 할 정도로 힘든 것은 같았다. 방학 때 만나야 할 사람이나 회의 같은 것을 다 개학 후로 미루어놓아서 처리해야 할 일이 좀 많아진 것도 있기는 하다. 여전히 정신없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상황을 좀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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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초등학생의 미적분 선행학습 천재는 33세 근처에 죽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모차르트는 35세에 사망했고, 슈베르트는 그보다 더 빨라서 31세에 죽었다. 쇼팽은 39세에 영면했다. ‘내 사랑 내 곁에’의 가수 김현식은 33세에 사망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린이’라는 단어를 남겨준 소파 방정환 선생도 그 나이에 돌아가셨다. 색동회를 근거로 어린이날을 만든 방정환은 세계적으로도 아동 인권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도 어린이에게 인권이 있다는 생각을 잘 못했다. 21세기의 한국, 지금은 어떨까? 불행한 일이지만, ‘동반자살’의 비극이 아직도 벌어진다.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는 간단한 원칙이 아직도 우리에게는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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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난방비 문제와 에너지 대수선 겨울철 혹한이 계속되면서 집집마다 난방비 때문에 난리다. 우리 집도 10만원 정도 올라간 것 같다. 12월 난방비 고지서가 마침 정치적 논의가 폭발하는 설과 겹치면서 정치권 한가운데 논의가 되었다. 아주 정밀하게 내가 못했냐, 네가 못했냐, 그야말로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몇 원 아니 몇 전 단위까지 들여다보는 정치 논쟁이 되었다. 만약 총선이 1월이나 2월에 있었다면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이 벌써 나왔겠지만, 우리의 총선은 늘 4월이다. 조상들의 절기는 기가 막혀서, 2월4일 입춘이 지나면 봄의 기운이 시작된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난방비 얘기는 다 잊혀져 간다. 수많은 총선을 보았지만, 난방비가 총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못 봤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12월에 있던 대선에서도 난방비가 논란이 된 적이 없었고, 5월 대선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름의 냉방도 마찬가지다. 만약 총선이 더운 8월이었다면 아마 지역 난방이 아니라 지역 ‘냉난방’ 개념이 벌써 자리 잡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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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안녕, 고마워, 인사와 감사 누군가를 만났을 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게 된다. 고마운 일이 생겼을 때에는 “고맙습니다”라고 감사를 하게 된다. 이 두 가지만 잘해도 일상생활에서 기본은 하게 된다. 간단하지만, 이걸 잘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감정이 생기고,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생기면 인사를 피하게 된다. 싫어도 인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고맙다고 말하는 것은 더더군다나 어렵다. 뭔가 잘되었을 때, 마치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잘된 걸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인사와 감사, 내 삶에서 지키려고 하는 내 삶의 기본이다. 그거만 잘해도 큰 욕은 안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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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윤석열 정부, 밥그릇 걷어차기 문화 정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단어는 ‘팔길이 원칙’이다. 너무 멀리 하지 않고, 너무 가깝게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반댓말은 ‘손바닥 원칙’이다. 문화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이렇게 표현한다. 힘을 가지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싶어지는 게 힘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건 힘의 속성일 뿐이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 촛불집회가 있었다. “이 돈이 다 어디서 나왔느냐”고 대통령이 질문을 하였고, 그때부터 정권 차원에서 ‘밥그릇 걷어차기’가 진행되었다. 문화 영역의 대부분의 생산자와 스태프들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고, 정부 문화정책에 연명하여 겨우겨우 버티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형식까지 갖추어서 진행된 것이 그 유명한 ‘블랙 리스트’ 사건이다. 그나마 유명한 사람들이 블랙 리스트 같은 데에도 올라가고 그런다. 협회나 이런 데에 별로 관련되어 있지 않고 인지도도 높지 않은 문화 창작인들은 블랙 리스트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지원금을 끊었고, 이런 경우에는 어디서 하소연할 방법도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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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치킨 500개를 까야 한다. 난 죽었다.” 이틀 후에 남자친구와 부산에 놀러가기로 되어 있던 어느 20대 여성이 너무 힘들다고 남긴 메시지를 읽고 나서 나는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올해 돌아가신 아버님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아버님의 장례식장에서도 나는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상주로서 행정적 일들을 처리하는 데 정신이 없어서, 감정이 생길 겨를이 없었다. 그렇지만 빵을 만들다가 사망한 어느 여성의 얘기는 경제학자로 살아온 나의 감정선에 ‘훅’ 들어왔다. 이게 뭐란 말인가? 그 사망 현장에서 다음날도 빵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놀랐고, 빵 만들다가 죽은 노동자에게 빵을 가져다준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무신경함에도 놀랐다. ‘어이 상실’이 아니라 ‘예의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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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대학 급식에 대하여 어렴풋한 1980년대 기억으로 처음 대학에 갔을 때 국밥이 450원 정도였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달 되지 않아서 500원으로 올랐다. 그것도 부담스러웠다. 당시 자판기 커피값이 100원이었는데, 두 끼 먹으면 커피값 한 잔만큼 더 내야 했었다. 우연히 갔던 고려대학교 학교식당의 장국밥은 400원이라서 뭔가 열심히 계산을 했던 기억이 있다. 1990년대에는 파리에서 학생 식당에서 두 끼를 먹었는데, 대략 500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장씩 학생증을 보여주고 샀었다. 그 비용에는 국가 보조가 있었다. 점심, 저녁 두 끼씩 먹으니까 나중에는 너무 지겨워졌지만, 그 돈으로 다른 데서 먹으려면 빅맥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런던의 대학 식당에도 몇 번 갔었는데, 확실히 양은 프랑스보다 많기는 했지만, 채소도 적고, 맛도 그닥이었다. 영국 학생들은 프랑스 대학 식사가 아주 맛있는 거라고 했지만, 쉽게 수긍이 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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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감시자는 누가 감시할 것인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책을 쓸 준비를 하던 시절, 교육방송의 ‘장학퀴즈’용 문제를 만드는 알바를 했다. 경제와 환경에 대한 문제들을 주로 냈다. 그러다 영화 <퀴즈쇼>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NBC 방송국에서 1958년 발생한 퀴즈 스캔들을 다루고 있다. 연승을 하던 젊은 컬럼비아 대학의 찰스 반 도렌은 사실 방송국으로부터 질문을 미리 받았다. 이 사건을 파헤쳐서 결국 부정을 저지른 방송국과 출연진을 잡아낸 조사관인 리처드 굿윈은 나중에 케네디의 연설 담당관이 된다. 미국을 뒤흔든 이 스캔들을 찾아내는 과정에서 내가 놀랐던 것은 그게 감사원이나 정보기관이 아니라 미국 국회 소속 조사관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국회가? 미국에서는 감사원, 정확히는 회계감사원이 국회 소속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고 나서야 처음 알았다. 국가별로 감사원의 법률적 위상이 조금씩 다른데, 영국·미국이 국회 소속이고, 프랑스는 별도의 독립 기관이다. 한국은 헌법상 대통령 산하로 감사원이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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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반환경 시대와 환경 포기 지역 내가 직업적으로 환경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다. 정몽구가 한때 환경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고, 마침 그 시절에 생태경제학으로 학위를 마쳤다. 좌파로 살면서 과연 밥이나 먹고 살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현대그룹이 잠시 환경에 관심을 가지면서 밥이나 먹고 사는 인생이 시작되었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 한국에 환경에 관심이 가장 높던 때가 그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사건 당시, 환경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이 지금보다 오히려 더 높았다. 두산그룹 회장이 그 사건으로 물러났고, 두산의 많은 임직원들이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사실 따져보면 지금의 4대강에서 발생하는 식수원의 녹조 사건은 페놀 오염보다 몇 배는 더 위중하고, 여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만약 지금 낙동강 페놀 사건이 벌어졌다면? 4대강 사업이 그렇듯이, 대충 덮고 넘어갔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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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의 경제수다방 경제 ‘올드 보이’와 환경친화적 경제 나도 어느덧 50대 중반이 되었다. 김영삼 시절부터 사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여러 번의 정권교체를 보았다. 아주 개인적인 단상이라면, 환경에 관해 가장 적극적인 대통령은 김영삼이었던 것 같다. 21세기를 맞으면서 ‘비전 21’을 정부 차원에서 마련했는데, 20세기 후반인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삼성도 지구환경연구소라는 환경 관련 연구기관을 운영했고, 이건 현대나 LG도 마찬가지였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은 아마 한국 사회가 환경에 대해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단일 사안일 것이다. 사회적 분위기도 공해 문제에 대해 아주 적극적이었다. 기억할 만한 사건은 1997년 수질이 급격히 악화된 시화호에 해수 유통을 결정한 순간이 아닐까 싶다. 지난 세기의 얘기지만, 김영삼은 나름대로 환경 문제를 풀려고 고민하기는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