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최신기사
-
세상읽기 아포칼립스의 인류학 “하루 품삯으로 고작 밀 한 되, 아니면 보리 석 되를 살 뿐이다. 올리브기름이나 포도주는 아예 생각하지도 마라.”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이다. 일곱 봉인이 해제되면서 일곱 재앙이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물가 폭등이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는 약 4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국제 밀 가격은 약 50% 상승하여 14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거의 매달 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통화량 증가와 공급망 충격이 주원인이다. 여기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기후 위기로 인한 흉작, 유가를 비롯한 원자재 가격 상승 그리고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한 수출 규제 등이 어지럽게 얽히고 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다.
-
세상읽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진화인류학 2014년 애슬레틱스와 레드삭스의 경기. 2점 차로 뒤지던 7회 말, 애슬레틱스의 투수 팻 벤디티가 마운드에 올랐다. 강력한 왼손 투구로 타자를 1루수 땅볼로 잡아냈다. 첫 번째 타자는 왼손잡이였다. 그런데 다음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우타자였다. 벤디티는 글러브를 바꿔 끼웠다. 이번엔 오른손 투구였다. 보통 좌투수는 좌타자에게, 우투수는 우타자에게 강하다. 벤디티는 타자에 따라 공 던지는 손을 바꿀 수 있는 양손 투수였다. 재미있게도 레드삭스의 그다음 타자는 블레이크 스와이하트. 그도 역시 좌타석과 우타석에 모두 설 수 있는 양손 타자였다. 하마터면 투수의 글러브 위치에 따라 타자도 좌우로 계속 왔다 갔다 하는 눈치게임이 벌어질 뻔했다.
-
세상읽기 적시생산과 가짜 풍요 왕은 분수를 좋아했다. 궁전 곳곳에 분수를 설치했다. 하지만 왕국은 가물었다. 분수에 쓸 물이 부족했다. 신하들은 왕의 심기를 걱정했다. 이러다 금방 물이 바닥날 것이다. 분수가 마르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묘책을 세웠다. 왕의 동선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왕이 지나가는 근처의 분수만 그때그때 작동시켰다. 덕분에 왕은 늘 즐거웠고, 왕궁은 물을 아낄 수 있었다. 물은 ‘적시’에 공급되었다. 풍요의 시대란다. 내 통장은 빈곤할지라도, 세상은 정말 풍요로운 것 같다. 근처 편의점에는 갖가지 물건이 24시간 대기 중이다.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오고, 저녁에 주문하면 새벽에 배송된다. 클릭만 하면 김이 모락거리는 음식이 현관 앞까지 대령한다.
-
세상읽기 나의 해방일지 “강남구로 이사 간 후, 가장 기뻤던 일이 뭔지 알아? 집주소를 이야기해야 할 때, 그때가 가장 좋았어.” 서울 강남의 한 연립주택에서 전세 생활을 했던 친구의 말이었다. 뭐, 전세인지 자가인지는 잘 묻지 않으니까 말이다. 198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저층 연립주택이다. 날림으로 대충 지은 집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보통 가격과 수요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수요의 법칙이다. 그런데 가격이 오르면 오히려 수요가 증가하는 상품도 있다. 베블런 효과다. 1899년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
세상읽기 차별의 진화, 미시동기와 거시행동 1.6킬로미터. 출퇴근 거리로는 아주 이상적이다. 그러나 초등학생의 등굣길로는 너무 멀다. 학교가 하나밖에 없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하지만 가까운 학교가 있다면, 굳이 ‘머나먼’ 등굣길을 택할 이유가 없다. 초등학교 배정의 제1원칙은 바로 근접성이다. 1951년, 캔자스주 토피카시에 살던 올리브 브라운도 생각이 같았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던 딸, 린다는 가까운 섬너 초등학교를 두고 한참 떨어진 먼로 초등학교에 걸어가야 했다. 전학을 원했지만, 교육위원회는 허락하지 않았다. 섬너는 백인 전용 초등학교였고, 린다는 흑인이었다.
-
세상읽기 프레카리아트, 불안한 인간 가장 흔하면서도 심각한 정신장애는 무엇일까? 1. 망상과 환청에 시달리는 조현병 2. 슬픔과 절망, 무기력에 괴로워하는 우울장애 3. 끊임없이 술을 찾는 알코올 사용 장애 4. 근심과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불안장애. 정답은 4번이다. 지난 수십 년간 우울장애가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불안장애의 아성에 미치지 못한다. 조현병은 시대에 따른 변화가 크지 않고, 알코올 사용 장애는 십여년 전부터 상당히 감소하고 있다. 불안장애야말로 시대와 장소를 초월한 정신장애의 왕이다. 불안은 필수적 원시 감정이다. 단세포 생물도 불안을 느끼며, 그 고통을 기억한다. 아메바가 담긴 작은 접시에 전기 자극과 화학 자극을 주었다. 아메바는 강력한 회피 반응을 보였을 뿐 아니라, 상당 기간 불안을 ‘기억’했다. 생존과 번식에 불리한 상황에 대한 적극적 행동이다. 2019년 네이처에 실린 연구다. 불안은 즉각적 행동을 일으키는 신속성, 기억과 연합해 오래도록 유지되는 지속성을 가진다.
-
세상읽기 전쟁과 평화의 인류사 20세기 중반, 수단 북부 제벨 사하바 유적에서 수십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약 1만1600년 전, 구석기 최말기 유적이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천수를 누린 것 같지 않았다. 창과 화살에 찔린 상처가 무수했다. 이른바 ‘전쟁 본능’ 가설의 단골 증거다. 인류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옛날, 구석기 시대의 전쟁 증거는 드물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지만, 인류사 초기에는 집단 간 폭력이 빈번하지 않았던 것 같다. 후기 구석기 말부터는 사정이 좀 달라진다. 전쟁의 증거가 넘쳐흐른다.
-
세상읽기 메타버스의 인류사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 얼마 전부터 애청하고 있는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신인’ 개그맨 이경규의 입담이 재미있다. ‘하이틴 스타’ 강수지의 ‘라이브’ 음악도 즐겁다. 유튜브의 마법이다. 최초의 메타버스는 무엇일까? 동굴 벽화는 수만 년을 넘나드는 그래픽 기반 저장장치이지만, 이보다 훨씬 널리 쓰인 저장장치가 있다. 바로 음성 기반의 이야기다. 최초의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신호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말문이 트인 인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야기를 통해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인류가 미래의 인류에게, 30년 전의 이문세씨가 지금의 나에게 말을 걸었다.
-
세상읽기 병원성 균형 이론 “우리는 이제 감염병 교과서를 덮을 수 있다.” 약 60년 전, 미국 의무총감 윌리엄 스튜어트의 말이다. 20세기 중반, 의학계는 인류가 감염병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희망에 젖어 있었다. 심지어 노벨 의학상을 수상한 면역학자 맥팔레인 버넷은 ‘미생물에 관한 기초 의학 연구는 더 이상 필요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 의학은 충분히 발전했고, 감염병은 자연적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만의 시대였다. 잠깐, 의학 발전은 그렇다고 치자. 감염병이 자연적으로 감소할 운명이라고? 1937년, 호주 정부는 야생 토끼를 박멸하기 위해서 점액종 바이러스를 일부러 퍼트렸다. 개체 수가 불어난 토끼로 인해 전 국토가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무려 99.8%의 치명률을 보였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자 바이러스의 독성은 점점 약화되고, 토끼는 점점 튼튼해졌다. 토끼는 다시 늘어났다.
-
세상읽기 하디-바인베르크 원리 하루 중 시간에 따라 그림자의 위치가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의 자전이라고 답했다면 오답이다. 최소한 일본의 소학교, 즉 초등학교 3학년에서는 말이다. 2016년에 논란이 되었던 문제다. 오답인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자전 현상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이미 오백 년 전에 일어났지만, 일본에서는 소학교 4학년이 될 때마다 매번 다시 일어나야 한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 2021년,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생명과학 Ⅱ 20번 문항 오류에 관해서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이 유지된다’라고 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답하라는 걸까?
-
세상읽기 누가 왕이 되는가 왕위계승자는 경주로 결정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엔디미온은 달을 보는 목동이자, 왕이었다. 그는 50명의 딸을 두었는데, 이는 50개의 달을 의미한다. 약 4년이다. 올림피아에서 최초의 경주 대회를 열었는데, 우승자는 금메달이 아니라 왕위를 손에 넣었다. 4년마다 왕위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부계 상속의 관습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비나혼 원칙을 따랐다. 비나혼이란 남성이 자신의 부족을 떠나 다른 씨족의 여성과 결혼하는 관습이다. 따라서 왕녀와 결혼한다면, 왕위도 얻는다. 아들이 아니라, 사위가 왕위를 가져갈 것이다. 즉 매번 외부에서 능력 있는 자를 ‘뽑아’ 왕을 충당했고, 진짜 권력은 딸을 통해 전승되었다.
-
세상읽기 시크한 듯 무심하게, 훈민정음 “브라운 어텀 시즌의 그루미한 레이니 위크앤드. 그레이한 스피릿을 달래줄 머스트 해브는 바로 에코 프렌들리 플레인 텀블러에 담긴 엣지 있는 에일 한 잔, 그리고 이오니아해의 샤이닝 오션에서 자란 담은 솔티드 튜니 토프트 라이스 한 스쿱.” 주말에 비가 오길래, 좀 울적해져서 플라스틱 컵에 맥주 한 잔을 따라 놓고 밥솥에서 밥 한 술을 퍼 담아 참치 통조림을 반찬 삼아 먹었다. 뭔 소린지 모를 외래어를 분별없이 늘어놓는 것만으로도 보잘것없는 일상이 한 차원 격상하는 것 같다. 이른바 ‘무심한 듯, 시크하게’로 대표되는 ‘보그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