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디-바인베르크 원리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하루 중 시간에 따라 그림자의 위치가 바뀌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구의 자전이라고 답했다면 오답이다. 최소한 일본의 소학교, 즉 초등학교 3학년에서는 말이다. 2016년에 논란이 되었던 문제다. 오답인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 자전 현상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이미 오백 년 전에 일어났지만, 일본에서는 소학교 4학년이 될 때마다 매번 다시 일어나야 한다.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된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2021년, 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생명과학 Ⅱ 20번 문항 오류에 관해서 ‘문항의 조건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학업 성취 수준을 변별하기 위한 평가 문항으로서 타당성이 유지된다’라고 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만 답하라는 걸까?

한국인의 머리칼은 대개 뻣뻣한 편이다. 그러나 고수머리도 좀 있다. 왜 낮은 빈도의 형질이 계속 유지될까? 초기의 진화학자들은 만족스러운 답을 찾지 못했다. 여러 조건이 ‘이상적’이라면, 한국인의 머리칼은 어떻게 될까? 어떤 학자는 곱슬머리가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다른 이는 5 대 5의 비율이라면 변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뭔가 석연치 않았다.

케임브리지대의 유전학자 레지날드 퍼넷은 이 문제를 풀어낼 정도로 영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문제를 풀 사람이 누군지 알 정도로는 영리했다. 친구였던 수학자 고드프리 하디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디는 간단한 방정식을 이용해서 문제를 풀었다. 비슷한 시기, 독일의 빌헬름 바인베르크도 같은 발견을 했다. 쌍둥이 유전을 연구하던 산부인과 의사였다. 그래서 이를 ‘하디-바인베르크의 평형 원리’라고 부른다. 앞부분은 영어, 뒷부분은 독일어다.

하디는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지배적 형질이 점점 전체 개체군 집단으로 퍼져나간다는 주장은 일말의 근거도 없다.’ 1908년 사이언스지에 투고한 짧은 글이다.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성립할 경우, 집단 내 대립 유전자 빈도는 변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조건은 바로 ‘진화가 일어나지 않는 조건’이다. 즉 돌연변이가 없고, 대립 유전자의 적합도가 같으며, 집단 간 이주가 없고, 무작위 교배가 일어나며, 유전자 부동이 없어야 한다. 물론 진화학자는 평형이 깨진 상태를 더 좋아한다.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혹은 계산이 틀렸거나).

생명과학 Ⅱ 20번 문제로 다들 혼란스럽다. 진화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나도 한번 풀어보았다. 재미있는 문제였지만, 너무 어려웠다. 두 집단을 제시하면서, 한 집단에서만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이 유지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집단은 아마 진화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몸 색깔과 날개 길이를 좌우하는 두 유전자를 제시했다. 각 대립 유전자의 빈도는 집단 간 차이가 없지만, 유전자형의 빈도는 집단 간 차이가 있다고도 했다.

여러 조건을 고려하면 문제에 제시된 집단 중 Ⅱ 집단이 하디-바인베르크 평형 집단이다. 그러면 I 집단의 유전자형 빈도는 좀 더 자유롭게 나타날 것이다(문제의 다른 조건을 만족하는 한). 이런 차이가 자연선택에 의한 것이라면, I 집단의 몸 색에 관해서는 이형접합체 불리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날개 길이는 아무리 궁리해도 말이 안 된다. 문항의 조건을 모두 성립시키는 답을 결코 찾을 수 없었다. 순전히 추정이지만, 문제에 등장하는 8/9은 2/9의 오기인지도 모르겠다.

이 문제의 ‘진짜 문제’는 실제 대학의 진화 수업이나 연구에는 쓸모없는 지식을 묻는다는 것이다. 단지 하디-바인베르크 원리를 활용한 두뇌 퍼즐에 불과한데, 그나마도 오류다. 출제자의 욕심이 너무 과했다. 정작 하디의 사이언스지 논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전문적 지식이 없는 주제에 관한 논의에 끼어들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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