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박한선 인류학자

“강남구로 이사 간 후, 가장 기뻤던 일이 뭔지 알아? 집주소를 이야기해야 할 때, 그때가 가장 좋았어.” 서울 강남의 한 연립주택에서 전세 생활을 했던 친구의 말이었다. 뭐, 전세인지 자가인지는 잘 묻지 않으니까 말이다. 1980년대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저층 연립주택이다. 날림으로 대충 지은 집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박한선 인류학자

박한선 인류학자

보통 가격과 수요는 정반대로 움직인다. 수요의 법칙이다. 그런데 가격이 오르면 오히려 수요가 증가하는 상품도 있다. 베블런 효과다. 1899년 사회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이 <유한계급론>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왜 가격이 오르는데, 수요가 증가할까? 흔히 인간의 헛된 허영심이라며 베블런 효과를 격하하곤 한다. 강남 아파트의 가치가 지방 아파트의 가치보다 50배나 높을 리 없다는 것이다. 사치에 빠진 세태를 탓하는 담론이 넘쳐난다. 국민 계몽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

“걔가 경기도를 보고 뭐라 했는 줄 아냐?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 하고 많은 동네 중에 왜 계란 흰자에 태어나서.” 매일 네 시간을 출퇴근에 허비하는 삼남매. 일이든 연애든 만족스럽지 않다. 나는 이등시민으로 살아가는 삼남매의 일상에 무척 공감했다. 하지만 16화를 전부 정주행해도 기다리던 ‘해방’은 없었다. 주인공은 서울 입성에 성공했지만, 무수히 층화된 노른자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을 뿐이다.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이 아니다. 강남구에만 14개의 법정동이 있는데, 하나를 빼면 다 흰자다.

사실 베블런 효과는 ‘수요의 법칙’의 예외가 아니다. 어떤 재화의 가치는 가격 자체에 의해 결정되므로 가격이 오르면 가치는 더 빨리 오른다. ‘그 물건이 비싼 이유는 비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물의 세계에도 관찰되는 현상이다.

우리는 다른 개체와 신호를 주고받는다. 위협 신호도 있고, 유혹 신호도 있다. 그런데 ‘진짜’ 신호를 보내려면 이래저래 노력과 시간이 많이 든다. 가급적 ‘가짜’ 신호를 보낸다. 강남 연립 전세 생활이다. 하지만 속고 싶은 이는 없다. 기만은 금세 간파된다. 끝없는 군비경쟁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한 신호, 즉 너무 비싸서 좀처럼 흉내내기 어려운 신호를 신뢰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베블런 효과’는 진화생물학에서 말하는 ‘비싼 신호 이론’과 논리적으로 동일하다. 다음 세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첫째 누구나 쉽게 식별할 수 있다. 둘째 쉽게 따라하기가 어렵다. 셋째 해당 자질은 자신 및 상대에게 이득을 줄 수 있다.

지금의 부동산 정책은 세 조건을 강화한다. 일단 투기 지역으로 지정하는 순간, 모든 국민은 ‘어디가 핫한 곳’인지 쉽게 식별할 수 있다. 과도한 규제는 ‘아무나 따라하지’ 못하는 두번째 조건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세번째 조건은? 강남의 생활 여건이 다른 곳보다 좀 낫기는 하겠지만, 분명 수십 배나 월등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강남 부동산은 ‘부동산 가격’ 자체로 엄청난 이득을 제공한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해방은 없단 말인가? 보통 엘크로 알려진, 말코손바닥사슴은 큰 뿔로 유명하다. 그런데 너무 큰 뿔을 가진 녀석은 가끔 목이 부러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진 것이다. 한 가지 자질에 집중된 비싼 신호는 말 그대로 너무 비싸다.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베블런재가 더 많아져야 한다. 우리 사회는 베블런재의 분화가 불충분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띠부띠부씰을 모으기 위해 수백 봉지의 빵을 사는 것 아닌가. 인간을 포함한 동물 대부분은 과시 욕구에서 해방될 수 없다. 그러나 더 건강한 과시욕으로 해방하는 것은 가능하다. 예술 능력도 좋고, 지적 성취도 좋고, 운동 능력도 좋다. 세상에는 강남 주소지 말고도 ‘추앙’할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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