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의 인류사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20세기 중반, 수단 북부 제벨 사하바 유적에서 수십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약 1만1600년 전, 구석기 최말기 유적이다. 그런데 언뜻 보아도 천수를 누린 것 같지 않았다. 창과 화살에 찔린 상처가 무수했다. 이른바 ‘전쟁 본능’ 가설의 단골 증거다.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인류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아주 오랜 옛날, 구석기 시대의 전쟁 증거는 드물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지만, 인류사 초기에는 집단 간 폭력이 빈번하지 않았던 것 같다. 후기 구석기 말부터는 사정이 좀 달라진다. 전쟁의 증거가 넘쳐흐른다.

인류는 원래 평화로웠는데, 농경과 문명이 시작되면서 폭력과 전쟁이 시작된 것일까? 에덴동산 주민이 점차 타락하며 ‘퇴보’했다는 주장이다. 자연과 평화, 문명과 전쟁을 서로 엮는 이분법이다. 간편하고 직관적이다. 그러나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우리가 점점 평화로워지고 있다고 했다. 원시 전쟁의 사망자는 전체 인구의 40%에 이르기도 했지만, 이제는 ‘겨우’ 2%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야만인은 점차 우아하게 ‘진보’했다는 주장이다. ‘에덴동산’ 가설과는 정반대지만, 역시 간편하고 직관적이다.

화평한 원시인, 호전적 문명인 가설이 맞을까? 아니면 야만적 원시인, 온화한 문명인 가설이 맞을까? 둘 다 아니다. 진실의 반쪽 얼굴만 보는 것이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전쟁도 사랑한다. 구석기 시대는 ‘절대’ 평화기였다는 말도 틀렸고, 신석기 인류는 ‘맨날’ 전쟁만 벌였다는 말도 틀렸다. 살육 흔적이 있는 구석기 유적도 있고, 전쟁 흔적이 없는 신석기 유적도 많다.

전쟁은 대개 폭력 행위를 동반하며, 폭력은 흔히 살해로 이어진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덮어놓고 싸우는 자기파괴적 본성은 진화할 수 없다. 전쟁광은 서로 죽이며 금세 사라질 것이다. 죽음과 맞바꿀 정도로 이득이 강력할 때만, 비로소 우리는 전쟁을 벌인다. 그런데 평화도 마찬가지다. 맹목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본성은 진화할 수 없다. 죄다 빼앗기고 노예가 될 것이다. 평화의 이득이 강력할 때만, 비로소 우리는 평화를 찾는다.

“상업적 교환은 평화롭게 해결된 잠재적 전쟁이며, 전쟁은 결렬된 교환적 거래의 결과다.”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말이다. 인류사를 거치며 전쟁이 늘어나거나 혹은 줄어든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사회생태적 환경에서 각 전략이 상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에 불과하다. 퇴보한 것도 아니고, 진보한 것도 아니다. 그저 상황에 알맞게 적응한 것이다. 인간성의 슬픈 진실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코로나19 유행으로 인한 고립과 단절도 원인 중 하나다. 러시아의 누적 사망자 수는 세계 4위다. 인구 규모를 감안하면, 단연 세계 1위다. 의학학술지 란셋의 최근 발표다. 감염병 유행은 집단 간 연대를 막는다. 고립은 의심을, 의심은 불신을, 불신은 폭력을 낳는다. 이 와중에 블라디미르 푸틴은 전쟁의 이익을 과대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서방 세계는 무역 중단과 금융 제재로 응수하고 있다. 기존의 교환 관계가 확전을 막고 있다. 처음부터 거래가 없었다면, 전면전 말고는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경제적 교류만이 아니다. 넷플릭스 영업 중단과 디즈니 사업 철수에 러시아 정부가 당황하고 있다. 문화 교류도 전쟁을 막는 또 다른 힘이다.

코로나19 유행이 잠잠해지면, 전 세계는 다시 활발히 연결될 것이다. 오로지 러시아만 고립될 판이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지금은 교환이 전쟁보다 훨씬 유리한 상황이다. 전쟁은 언젠가 끝날 것이다. 어른들의 오판으로 이미 목숨을 잃은 아이들만 안타까울 뿐이다. 우크라이나의 조속한 평화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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