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시생산과 가짜 풍요

박한선 인류학자

왕은 분수를 좋아했다. 궁전 곳곳에 분수를 설치했다. 하지만 왕국은 가물었다. 분수에 쓸 물이 부족했다. 신하들은 왕의 심기를 걱정했다. 이러다 금방 물이 바닥날 것이다. 분수가 마르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다. 묘책을 세웠다. 왕의 동선을 꼼꼼하게 체크했다. 왕이 지나가는 근처의 분수만 그때그때 작동시켰다. 덕분에 왕은 늘 즐거웠고, 왕궁은 물을 아낄 수 있었다. 물은 ‘적시’에 공급되었다.

박한선 인류학자

박한선 인류학자

풍요의 시대란다. 내 통장은 빈곤할지라도, 세상은 정말 풍요로운 것 같다. 근처 편의점에는 갖가지 물건이 24시간 대기 중이다.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에 오고, 저녁에 주문하면 새벽에 배송된다. 클릭만 하면 김이 모락거리는 음식이 현관 앞까지 대령한다.

하지만 좀 이상하다. 공연히 2인분을 시켜서, 1인분을 버리는 소비자는 없다. 팔리지도 않는 물건을 왕창 만들어 폐기하는 생산자도 없다. 현대인의 풍요는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는 풍요다. 정말 재화가 넘쳐나는 것은 아니다. 왕의 분수와 다르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가짜 풍요다.

구석기 인류는 늘 풍요와 빈곤을 주기적으로 겪었다. 어떤 때는 넘쳤고, 어떤 때는 모자랐다. 넘칠 때는 말 그대로 넘쳐흘렀다. 매머드 한 마리를 잡으면 몇 달 식량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매머드 한 떼가 나타나도 관심 없다. 진짜 풍요다. 물론 진짜 빈곤도 흔했다. 조상은 수백 종의 식량이 있는 광대한 영역을 ‘과도’하게 유지하며 빈곤에 대비했다.

1950~1960년대 일본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자원도, 기술도, 자본도 없었다. 일본은 모든 것을 잘게 나누기 시작했다. 딱 필요한 때에, 딱 필요한 만큼만, 딱 필요한 곳에 공급했다. 그러나 신경 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모든 흐름이 딱 맞아떨어져야 한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다. 다행히 사람은 넘쳐났다. 생산 자원의 이동표를 만들었다. 간판(看板) 방식이라고 하는데, 간판이란 마분지로 만든 표를 말한다. 일본인은 매뉴얼을 성실하게 따랐고, 적시생산시스템은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적시생산이 성공하면 빈곤은 풍요로 탈바꿈한다. 버리는 것 없이 딱 맞춰서 제때 공급하면 모두 행복하다. 그러나 적시생산시스템은 정말 ‘적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할까? 불과 2년 전, 한국도 일본도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난리가 났다. 마스크는 배급되었다. 급한 사람은 직접 천을 잘라 효과가 불확실한 마스크를 만들었다. 의료진도 며칠씩 같은 마스크를 썼다. 풍요와는 거리가 멀다. 적시생산시스템은 재난과 전쟁, 경제 위기 등 돌발 상황에 취약하다. 만약 마스크가 아니라 식량이었다면, 적지 않은 이가 굶어 죽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인력이다. 좀처럼 ‘적시적량적소 공급’이 어렵다. 아기가 부족하다는데, 불과 30년 전만 해도 아기가 넘쳐난다고 했다. 대학이 부족하다더니, 이제는 학생이 부족하단다.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은 비선형적이다. 장기적인 미래 예측은 단지 어려운 수준이 아니라, 아예 불가능하다. 미래가 불확실하다면 재고는 불필요한 비용이 아니라 핵심 자산이다. 사람은 ‘공급’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주문 버튼을 눌러도 20년 후에나 배송된다면, 처음부터 다양하고 넉넉하게 주문하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코로나19 대응은 그리 성공적이지 않았다. 마스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백신 개발도 그렇다. 미국과 영국은 어떻게 몇 달 만에 백신 개발에 성공했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풍요로운 ‘잉여’ 연구 인력도 큰 역할을 했다. 한국과 일본은 아직도 자체 백신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적시생산시스템은 가짜 풍요다. 특히 사람에 관해서는 분명 그렇다. 당장 불필요해 보이는 인력도 충분히 쌓아 둘 수 있어야 진짜 풍요다. 사람은 언제나 비용이 아니라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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