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왕이 되는가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왕위계승자는 경주로 결정되었다. 그리스 신화의 엔디미온은 달을 보는 목동이자, 왕이었다. 그는 50명의 딸을 두었는데, 이는 50개의 달을 의미한다. 약 4년이다. 올림피아에서 최초의 경주 대회를 열었는데, 우승자는 금메달이 아니라 왕위를 손에 넣었다. 4년마다 왕위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박한선 정신과 전문의·신경인류학자

아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 아닌가? 그러나 부계 상속의 관습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비나혼 원칙을 따랐다. 비나혼이란 남성이 자신의 부족을 떠나 다른 씨족의 여성과 결혼하는 관습이다. 따라서 왕녀와 결혼한다면, 왕위도 얻는다. 아들이 아니라, 사위가 왕위를 가져갈 것이다. 즉 매번 외부에서 능력 있는 자를 ‘뽑아’ 왕을 충당했고, 진짜 권력은 딸을 통해 전승되었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초기의 여덟 왕은 아무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다. 일부는 투표나 추대를 통해서, 그리고 일부는 왕녀와 결혼하여 왕이 될 수 있었다. 심지어 한 명은 노예였지만,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왕위에 올랐다. 신분보다 실력이 중요했다.

인류 최초의 리더십은 수렵 리더십이었다. 그러나 사냥은 일시적인 과업이었다. 수렵이 끝나면 모두 평등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신석기 초기, 사정이 달라졌다. 부족 간 전투가 빈발하면서 수렵 리더십은 전투 리더십으로 발전했다. 전투력을 가진 젊은 남성이 싸움을 진두지휘했다. 사냥은 실패해도 한 끼 굶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전쟁에 패배하면 부족 전체가 몰살이다. 고대 국가는 왕녀와 혼인할 권리를 내걸고 용감한 젊은이를 적극 선발했다.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족은 ‘알라 가추’라는 독특한 혼인 풍습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약탈혼이라는 반인권적 범죄로 알려져 있는데, 남성이 신붓감을 납치하는 악습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에 의하면, 이러한 의례는 사실 신랑을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일단 청혼남은 ‘칼림’이라는 추적비용을 먼저 내야 한다. 그리고 종종 여러 명의 예비 신랑이 동시에 경쟁한다. 하지만 신부는 말을 채찍질하여 전속력으로 도망칠 권리가 있다. ‘지원자’ 입장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신부의 환심부터 사야 하고, 이에 더해 공정한 경주를 통해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추격’ 의례를 통해서 신부는 마음에 드는 남편을 골랐다.

왕은 딸에게 나라를 온전히 물려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일단 탁월한 사윗감부터 찾아야 했다. ‘공주를 구하는 자에게 왕국을 물려주겠다’라는 동화 속 흔한 클리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다만 왕녀는 국민으로 바뀌었고, 왕위는 대권으로 바뀌었다. 엔디미온의 딸보다 약간 많은 60명의 딸, 즉 60개월의 임기다.

이런 식이니 고대 사회의 왕은 늘 좌불안석이었다. 주변엔 온통 처가 쪽 사람이다. 앞서 말한 로마의 초기 왕 상당수는 암살당하거나 쫓겨났다. 심지어 한 명은 벼락을 맞아 죽었다. 능력만 보고 뽑았으니, 늙고 무능해지면 ‘안녕’이다. 프레이저는 이렇게 말한다.

“고대 왕국의 군주는 오직 국민을 위해서만 존재하며, 그의 생명은 오직 국민의 이익을 위해 소임을 다할 때만 가치가 있다. 소임을 다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보여주던 배려와 헌신, 종교적 경의는 이내 증오와 경멸로 바뀐다. 불명예스럽게 쫓겨나는 것은 물론, 생명을 부지하는 것만도 다행일 것이다. 신으로 숭배하던 군주를 어느 날 갑자기 범죄자로 처단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왕위계승전의 막이 올랐다. 우리 사회의 ‘왕위’는 전제 군주제의 그것보다는, 고대 사회의 그것에 더 가깝다. 아무리 뛰어나도 될까 말까. 그래 봐야 고작 5년. 게다가 대개 끝도 안 좋다. 인류사를 통해 무수히 반복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번 경주에 나선 선수들은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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