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길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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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빚과 실 말할 수 있는 빚이 있고, 말할 수 없는 빚이 있다. 말할 수 있는 빚은 ‘반은 은행 거야’라는 말로 자신의 집을 소개하거나, 운영에 부침을 겪는 업주가 희망을 찾을 때의 것이다. 겸손하고, 성실하고, 명예롭다. 반면 말할 수 없는 빚은 말해진 적 없기에 예를 들 수가 없다. 생존이나 중독에서 기인했을 것이라 짐작할 뿐. 숨기고 감추느라 어둠 속에서 축축해진 그것들의 이미지는 오만하고, 나태하고, 굴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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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코 없는 코끼리 눈을 감고 코끼리를 만졌다. ‘왜 코가 없지?’ 코끼리의 몸을 아무리 더듬어도 내 손끝은 눈을 감기 전 보았던 ‘코 없는 코끼리’의 형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내 모든 감각이 시각 속에 갇히는 기분이었다. 정답을 적었는데도 자꾸만 틀렸다고 하는 이상한 시험문제를 푸는 것 같았다. 처음 느끼는 막막함이었다. 엄정순의 ‘코 없는 코끼리’는 ‘본 것’ 대신 ‘보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작품으로, 시각 예술이면서도 시각 중심의 감각을 전복시킨다. 작가는 시각장애인이 손끝으로 코끼리를 이해했던 경험을 조각으로 복원해 시각에만 의존해서는 도달할 수 없는 영역, 시각을 차단해야만 알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에 대해 말한다. 감각의 체계가 다르기에 낯선 상상과 새로운 통찰이 있는 세상, 타인이 되어보지 않고도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 ‘코 없는 코끼리’가 인도하는 그런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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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물과 불 지난 2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유튜브로 시청했다.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는 시상식답게 채팅창은 소란스러웠지만, ‘올해의 앨범’을 꼽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단편선 순간들’의 <음악만세>. 그들의 노래는 ‘물에 잠기면서 시작해,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끝나는 이야기’라는 설명처럼 신비로웠다. ‘위풍당당 행진곡’을 편곡한 첫 번째 트랙부터 ‘독립’ ‘물’을 지나 ‘불’에 닿을 때까지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웃으며 ‘삶과 음악’이라는 내러티브를 완성했다. 눈치 보며 키득대고, 배를 잡고 폭소하고, 절망하듯 헛웃음을 짓고. 그렇게 모인 웃음은 아홉 번째 트랙 ‘음악만세’에 이르러 절규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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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눈 뜨기 연습 집 앞 하천에 물이 마르면 괜히 눈이 삐뚤어졌다. 냇물을 제집 수도처럼 쓰는 골프장과 저수지 근처의 도축장 공사판을 종일 탓하느라 그랬다. 야속할 만큼 오지 않던 비는 내 눈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쯤 소리 없이 내렸고, 하천에 물이 차면 모난 마음이 조금씩 깎였다. 산천이 대수냐, 저 미운 골프장 방문객들이 마을을 먹이고 살린다. 쌀밥을 한술 떠 제육 반찬을 올리고 둥글어진 속에 넣었다. 마음에서 깎여 나간 모서리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혔어도 밥알을 뭉쳐 삼키면 그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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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광주 드라이브 여행을 자주 다니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불과 200㎞ 떨어진 이웃 도시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사실을 끝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왜였을까? 문장을 좀 더 또렷하게 고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려나. 내가 사는 도시가 대구이고,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가 광주라는 사실이 그 감정의 원인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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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긴 연휴를 맞아 요리를 계획했다. 메뉴는 ‘오코노미야키’. 흡사 ‘해물전’처럼 보이지만 새우와 오징어의 탱글한 식감과 마요네즈와 간장이 혼합된 짜릿한 소스 맛은 ‘혼술’에 제격인 안주 같기도 해서 홀로 맞는 명절에 더없이 어울린다. 언젠가 먹었던 그 맛을 떠올리며 신나게 마트로 뛰어갔다. ‘아, 인간은 이렇게 약간의 식량과 여유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그러나 재료를 담기 위해 채소 진열대에 다다른 순간, 내 행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양배추 7300원.” 연휴엔 라면을 먹으면서 농산물 가격 폭등의 원인을 다룬 기사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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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지난달 남태령에서 있었던 ‘전국농민연합’의 트랙터 시위 풍경을 담은 기사에 “K팝 실컷 부르고 좋겠다. 빠순이만 신나는 탄핵 파티”라는 댓글이 달렸다. 총 46개의 따봉을 받아 ‘베스트 의견’이 되었길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너만 빼고 파티하니까 빡쳤쥬? 너는 혼자라 아무것도 못하쥬? 끼워주는 사람도 없쥬? 평생 없을 꺼쥬?”라는 답글을 남기고 말았다. 나는 내심 키보드 배틀을 기다렸지만 상대가 내 문장 수준에 놀랐는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아 기대했던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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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슬픔의 K팝 집회 ‘여자는 감정적’이라는 말은 쉽게 사용되지만, 정작 화가 난다고 사람을 위협하고 물건을 던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새삼 얼마나 상투적 표현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마음을 누르고 감추어야 하는 사람의 손은 늘 비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자리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사람은 짱돌 하나만 쥐고 있어도 용기가 생기는 법이니 손 안을 채운 그들의 얼굴이 자유롭고 비장해 보인 것은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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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헛똑똑이 ‘똑똑한 장남’에겐 클리셰가 있지 않은가. 부모와 손아래 형제들의 뒷바라지로 상경해 혼자 잘난 줄 알고 떵떵거리며 일을 벌이다 결국 집안 기둥을 뿌리째 뽑는다는 괘씸한 이야기. 아니, 이야기보다는 풍속이라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나는 그런 유의 이야기를 들으면 장남도 아니면서 괜히 마음이 따끔따끔해졌다. 왠지 그 이야기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나는 자라며 부모와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한 적도, 양보한 적도 없었다. 늘 내가 먼저였기에 가족의 배려는 당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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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피라미드에 갇히다 목요일 밤이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본다. 방송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뒤 퀭한 눈으로 주말만을 기다리는 밤에 더없이 어울린다. 눈으로 읽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이야기를 1시간이 넘도록 정성껏 구연하는 세 명의 진행자와 그런 노고에 보답하듯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대꾸해주는 연예인 게스트들. 그들의 대화는 다분히 연극적이고 그래서 조금 민망하다. 그러나 누군가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정도의 기운만 남은 목요일 밤엔 그 민망함도 잠시 스치는 기분일 뿐, 나는 기꺼이 그들의 말없는 관객이 되어 이야기를 귀로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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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아지트 아이들은 좁고 어두운 곳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든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아지트도 할아버지의 낡은 옷장 한 칸이었다. 나는 매일 그 안에 들어가 숨을 죽인 채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가 잠에 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문고리에 매달린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면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거라는 안도와 누군가 나를 찾아 줄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밀려왔다. 결코 고립이 아닌, 누군가 나를 수색할 수 있을 정도의 은신. 그 욕구가 바로 아지트의 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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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길의 채무일기 죄와 빚 시나리오를 쓰던 친구는 1년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24시간 카페의 흡연실에서 보냈다. 테라스를 개조해 만든 흡연실은 밖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드는 공간이었는데, 덕분에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나며 친구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유리창 밖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종종 괴롭고 자주 외롭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