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방송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지각을 하면 오리걸음으로 언덕을 오르는 벌을 받았다. 언덕 밑에서부터 학교 본관 건물이 있는 곳까지 쪼그려 앉아 귀를 잡고 걸으면 30분이 걸렸는데, 가장 큰 고비는 언제나 마지막 10분 코스였다. 마지막 고지를 오를 땐 교문 너머 건물이 보였다 말았다 했다. 눈앞에 끝이 보이면 초인적인 의욕이 생기기 마련인데 나는 늘 그 지점에서 맥이 풀리곤 했다. 엉덩이를 옮기려 몸을 일으킬 때마다 건물 정면에 붙은 문장이 보이던 탓이었다. ‘참되고 어진 어머니가 되자.’ 여기서부터 스무 걸음. 눈 딱 감고 조금 더 기어가면 되는데 나는 번번이 교문 앞에서 주저앉았다. “선생님 못하겠어요. 이게 제 한계예요.”

시간 안에 결승점을 통과하지 못하면 구령대에 일렬로 서서 다시 손바닥을 맞았고 선도부가 벌점도 매겼다. 이미 온몸이 후들거려 걸을 수도 없는데 폭행도 당하고 전과까지 생기다니 지나치게 가학적인 것 아닌가? 온갖 불만을 터뜨리며 교실로 이동할 땐 늘 창밖엔 같은 재단의 남학교가 보였다. 열을 맞춰 운동장을 뛰고 있는 무리가 저 학교의 지각생들이겠구나. 묘한 동질감을 느끼며 그 풍경을 응시하면 이내 건물에 붙은 표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질서 있고 창의적인 국민이 되자.’ 우리는 어머니고 너희는 국민. 동질감이란 뒤를 돌아서면 꺼지는 거품 같은 것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아흔이 넘어 손자 손녀 이름을 헷갈릴 때에도 송해와 강호동은 알아봤다. ‘송해 그 양반이 아직 사회를 보나.’ ‘자는 안다. 호동이 아이가.’ 나는 힘없이 웅크린 채 여생을 보내는 할머니가 무언가를 기억한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왠지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는 말 뒤에는 응당 “전국노래자랑!”과 “일박~ 이일!”이란 외침이 이어져야 했다. 그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국을 떠돌며 ‘국민 여러분’을 외치던 두 남자에게 ‘국민MC’라는 타이틀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 나라의 ‘국민’인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건데, 언덕을 오르며 고뇌를 강제하던 체벌은 오랫동안 내 몸에 남아 나에게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인지를 끝없이 생각하게 했다. 나는 국민. 무대에 게스트로만 초대될 수 있는 국민. 아가씨, 아줌마, 손녀가 되어 그에 부합하는 역할을 해내면 되는 국민. 전국 팔도에서 웃고 우는 남자들을 구경하는 국민. ‘요정’이나 ‘여신’이 아니라면 감히 그 세상을 넘볼 수 없는 국민.

2023년 KBS는 공영방송 50주년을 맞아 특집방송을 기획했다. 프리젠터로 나선 강호동은 ‘국민의 방송’으로 KBS를 호명하며 “‘국민’이라는 단어가 주는 영광”을 자신의 지난 출연 작품들과 나란히 두고 다시 “국민 여러분들께 더 큰 즐거움으로 보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KBS를 빛낸 50인’을 기리는 그 기념식에는 <전국노래자랑>의 새 진행자 김신영도 포함되었다. 김동건, 최불암, 유동근, 윤석호 등 남성 출연자들 사이에서 그는 “KBS가 100주년을 맞으면 <전국노래자랑>의 왕할머니가 되어 이 자리에 함께하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우렁차게 외쳤다.

김신영이 ‘일요일의 막내딸’이 되었던 1년6개월 전, 나는 내가 사랑하는 텔레비전 속에서 비로소 내가 ‘참되고 어진 어머니’가 아닌 ‘국민’일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나는 그 기쁨에 꽤나 고무되어 많은 것을 갈망했다. 그래서 지금 나는 순수하게 절망한다.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자가 갑자기 교체된 정치적 사유를 추측하는 일도, 절차를 무시한 석연치 않은 과정을 부당하게 여기는 것도, ‘여자라서가 아니라, 진행 자질 자체가 문제였다’는 지겨운 가혹함도, ‘자질을 평가하기에는 너무 적은 기회였다’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울화도. 모두 참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한 가슴에 묻으면서.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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