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흔한 풍경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시장 초입의 버스정류장에서 한 할머니와 버스기사가 실랑이를 벌였다. 할머니에게는 아직 정류장까지 오지 못한 세 명의 일행을 위해 시간을 끌어야 하는 미션이 있었고, 버스기사에게는 대부분이 노인인 승객들을 데리고 이 복잡한 시장통을 무사히 벗어나야 하는 미션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의 목표가 충돌하니 언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할머니는 자기 말을 무시하고 자꾸만 문을 닫으려 하는 기사가 야속했고, 버스기사는 다리를 계단에 올린 채 막무가내로 기다려달라 조르는 할머니의 행동에 화가 났다.

‘참전하겠습니까?’ 눈앞에 상태창이 깜빡였다. 지체 없이 ‘YES’ 버튼을 누른 것은 노인을 공경하는 젊은이의 마음보다, ‘저 남자가 여자라고 막 대하네?’ 하는 ‘페미’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버스기사가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느냐, 마느냐, 다투는 순간에 내 참전의지는 무엇으로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나 또한 배차 간격이 큰 그 버스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를 부축해 버스에 태운 뒤 앞문을 온몸으로 막으며 ‘진상’ 역할을 자청했다. 짜증이 극에 달한 버스기사가 호통을 치고, 타고 있던 승객들마저 조금씩 성화를 낼 때쯤, 양손 가득 짐을 든 할머니의 친구들이 보였다. ‘남자 승객한테도 이렇게 굴었을 거냐’는 말을 간신히 참고, 마음에도 없는 예의를 차리려 하니 해괴한 진행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기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르신들께서 지금 막 등장하고 계십니다!”

나의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할머니들은 마치 페스티벌에 지각한 헤드 라이너처럼 화려하게 등장했고 그만큼 승객들의 비난도 맹렬하게 쏟아졌다. “할매들! 다음부터는 돈 모아서 택시 타이소!” “대중교통이 와 대중교통이고? 다른 사람도 생각해야지” “무슨 장을 이래 많이 봤능교!” 버스 출발이 지연된 시간은 1분 남짓이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할머니들의 짐이 움직이지 않도록 좌석 안쪽에 야무지게 밀어 넣고 “조금 기다려줄 수도 있잖아요”라는 말로 그들을 방어했다. 젊은이의 마음이나 ‘페미’의 마음도 아닌, 그저 일을 크게 키워버린 자의 미안함으로.

그래도 할머니들은 내 덕분에 버스를 놓치지 않았다며 연신 고마움을 표현했다. 다른 승객들에게 나는 괜한 오지랖을 부려 갈 길을 방해하는 맹랑한 여자였지만, 이 할머니들에게 나는 싹싹하고 예의 바른 청년일 수 있었다. 좌석에 앉은 할머니가 나를 쿡 찌르더니 자신의 무릎을 탁탁 쳤다. “여기라도 앉아라.” 괜찮다고 정중하게 거절하며 싹싹하고 예의 바른 청년 이미지에 몰입하려는 찰나, 뒤에서 나를 바라보던 또 다른 할머니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가씨 근데 가방에 이런 거는 와 달고 다니노?” 가방? 내 가방에 뭐가 달렸지? 아름다운 청년으로 존재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나의 백팩.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냉랭한 표정. 모든 것을 조합하느라 판단이 느려진다. 내 가방에 달린 것은 노란 리본 열쇠고리. 그렇다면…. 말문이 막힌 채 얼어붙어 있는데 이어지는 또 다른 할머니의 말이 더 큰 충격을 가한다! “우리는 보수다 보수!”

보수 할머니들이 내리고 나는 굳은 상태로 그들이 앉던 자리에 앉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먹먹한 기분으로 창밖을 보는데 교차로 곳곳에 죽은 독재 정권을 찬양하는 여당의 현수막과 그 여당을 심판하고 말겠다는 야당의 현수막이 나란히 나부끼고 있었다. 뭘 응시해도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의 끝이 엉덩이를, 허벅지를, 마음을 찌른다. 그 고통으로 싹싹한 청년이고 싶던 마음도, 다소 부실했던 ‘페미’의 마음도, ‘오른쪽’이 ‘옳은 쪽’이라 당연히 여기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마음과, 그게 싫어 탈출하고 싶었던 마음도 전부 잊고 읊조려본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가 엉덩이를 쿡쿡 찌르는 것 같다. 아프게 느껴지다니. 4월이구나.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복길 자유기고가 <아무튼 예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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