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이 동행하자시면

동행을 제안할 때는 보통 어디로 어떻게 갈 계획인지를 설명한다. 함께 가기를 기대하는 이유도 붙이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은 동행 제안은 꽤나 무례하고 때론 폭력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말하는 ‘약자와의 동행’은 어떤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그의 말에는 ‘약자’가 자주 등장한다.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일관된 모습이다. “공정과 상식의 이름으로 진짜 약자를 도와야 합니다.” 대선 후보 수락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 그는 국민의힘 선대위 산하 ‘약자와의 동행 위원회’ 위원장을 직접 맡기도 했다. 취임 후 뜸하다 싶더니 취임 100일 전후로 ‘약자’가 다시 불려 나오기 시작했다. 발달장애인 복지관, 다문화가족 지원센터, 독거노인 가정, 자립준비청년 생활시설 등을 방문하는 행보가 이어졌다.

약자를 보호한다, 두껍게 지원한다, 따뜻하게 동행한다는 말들이 나부끼는 것에 비해 정책 대상으로서 ‘약자’가 어떤 집단인지 분명히 밝힌 적은 없다. ‘약자복지’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조금 선명해졌다. “어려움을 한목소리로 낼 수 없는” “자기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운” 이들이 ‘진짜 약자’라고 했다.

소득이 적은 사람이 사회적 약자가 되는 것은 소득이 적기 때문이 아니다. 소득이 적은 사람을 쉽게 무시하거나 권리를 빼앗는 사회 구조 때문에 약자의 위치에 놓이게 된다. 여성도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약자가 되지 않는다. 여성이라는 성별을 출산의 도구나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는 구조에서 여성은 약자가 된다. ‘여성’에 부정적 속성을 할당하며 목소리를 지울수록 집에서는 맞아도 되는 사람, 일터에서는 잘려도 되는 사람이 된다. 사회운동이 약자의 집단적 목소리를 조직하려고 애쓰는 이유다. 보호도 지원도 중요하지만 거기서 멈춘다면 약자의 자리를 벗어나기 어렵다.

‘목소리’에 주목하는 것은 정책이 진화할 계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윤석열은 창조적인 논리를 전개한다. ‘사회적 약자라면 목소리 내기 어렵다, 목소리를 낸다면 진짜 약자가 아니다.’ 김은혜 홍보수석의 설명을 옮기자면 “약자인 척하는 강자”다. 그러므로 윤석열은 약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말할 수 없는 자에게서는 들리지 않으므로, 말할 수 있는 자라면 들을 이유가 없으므로.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간 포항의 한 식당에 방문했던 윤석열이 그랬다. 그는 피해를 호소하는 상인을 지나치며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만 반복했다. 당사자가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듣지 않았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무의미한 소리로 만들어버린다. 그가 약자 보호를 말할수록 약자는 더 약해진다. 약자가 약해지는 순간은 소득이 적거나 나이가 많거나 성별이 여성이라는 걸 발견하는 순간이 아니다. 동등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현실이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불안이 엄습할 때, 누군가의 선의와 보호 말고 기대할 것이 없다는 무력감이 짓누를 때, 그래서 인간의 존엄과 권리가 내게도 있는지 의문이 찾아들 때, 그때 우리는 ‘진짜 약자’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약자의 위치를 거부할 수 있게 된다. 목소리를 지우려는 사회에 맞서 권리를 주장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누군가의 보호를 기다리는 대신 서로 기대며 지켜주는 관계를 만듦으로써, 그래서 서로의 존엄과 권리를 비춰주는 거울이 됨으로써, 우리는 ‘약자’를 만드는 세상을 바꿔왔다.

정부조직 개편안이 발표됐다.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대부분의 업무를 보건복지부로 이관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아니나 다를까, 윤석열 대통령은 “여성, 가족, 아동,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를 더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약자에 머무르라는 말이다. 구조적 성차별을 고발하는 목소리는 듣지 않겠다는 고백이다. 평등을 지우겠다는 선언이다. 따라나설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기어이 동행하자시면, 그가 길을 차지하고 있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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