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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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비자폐인의 ‘결핍’ 내가 보람과 효능감을 느끼는 일은 젠더, 빈곤, 장애, 불평등에 대해 사회적 의미를 생산해내는 말하기와 글쓰기, 그 의미를 구현하는 공동체를 위한 프로젝트 기획이다. 고연봉은커녕 풀타임 고용도 안 되니까, 생계 노동도 병행해왔다. 후자를 할 땐 뭔가를 ‘꺼둬야’ 했다. 올해 주된 생계 노동은 서울대형 RC(기숙형 대학) 사업을 개시하는 LnL시범사업단 근무였다. 거의 신입생 270여명의 생활, 학습 지도를 맡은 대학원생 조교로 일했다. 처음엔 충실한 직장인으로 일할 작정이었다.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사업단의 수족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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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사회’적 합의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가는 길목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생후 6주 된 고양이가 난감해서 우는 소리. 발길을 멈추고 들어보니 건물 담장 뒤쪽이었다. 고양이는 쉬지 않고 빼옥빼옥 했다. 사람들은 흘금 보고 무심히 지나갔다. 까치발을 들어도 잘 안 보였다. 어쩌지. 몰라몰라. 야근러는 피곤하다. 세 걸음 정도 집으로 향하다가 다시 뒤돌았다. 쟤도 ‘걔’처럼 그럴 수도 있으니까…. 이건 다 걔 때문이다. 여기서 ‘걔’란 고양이 ‘도레레’로, 생후 6주에 우리집에 왔다. 도레레는 지하주차장에 버려진 오토바이 안에서 꾀죄죄하고 아픈 몰골로 꺼내졌다. 그냥 두면 걔가 죽을까 봐 임시보호라도 하려고 데려왔다. 도레레가 온 첫날 식구는 헙, 하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얘는 너무 작아서 멀리 떨어뜨려 놓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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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수저를 그냥 놓고 싶다 클로디아 골딘이 노벨 경제학상을 탔다고? 드디어 한국에서 골딘을 읽겠구나, 했다. 골딘은 성별 임금격차의 원리를 이렇게 밝혔다. 노동시장에는 탐욕스러운 일과 유연한 일이 있는데, 전자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갈아 넣을 수 있는 일, 후자는 그렇지 않은 일이다. ‘가정’ 영역에서 책임 있는 사람, 즉 여성은 후자로 갈 수밖에 없는데, 급격한 임금 인상은 전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골딘의 지적은 핵심적이다. 여성이라 해야 하는 뭔가가 있는데, 그게 노동시장 같은 사회구조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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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사기꾼을 키우는 나라 얼마 전 트위터에 이런 글이 돌았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과 그 반대의 특징. 그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시험을 ‘지식 쌓기’라고 생각하지 않고, 문제 풀기 트레이닝에 집중한다. 반대는 지식을 쌓기 위해 공부한다. 마치 논문을 쓰는 것처럼. 사람들은 후자를 비웃었다. 그걸 보고 생각했다. ‘이거 난데…?’ 생활스포츠 지도사 현장실습을 다녀왔다. 꼬박 1년 과정의 마무리 단계. 연수 말미 소논문을 쓸 때 나는 본격적으로 불탔다. 연령별 트레이닝 방법론과 운동 발달 단계 이론을 보며 무릎을 탁 쳤기 때문이다. 이건 선형적 시간 개념 문제구나! 운동을 시작할 때 나는 ‘초기 성인기’였다. 모든 움직임 기술이 최상으로, 이를 활용해 운동을 가르치는 시기다. 나는 난생처음 간 취미 발레반에서 영문 모르고 허우적거렸는데, 나중에 가장 초보적인 운동 기술인 제대로 앉기, 서기, 걷기부터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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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권위란 무엇인가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김연아 선수의 이 말이 유명해진 것은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여자 싱글 부문 최고점을 경신하고 금메달을 딴 후다. 열악한 환경에서의 극기 훈련, 그걸 ‘그냥 했다’는 말에 모두 감동받았다. 반면 나는 ‘그냥 하는’ 사람의 정반대에 있다. 매번 생각을 하고, 그냥 하라고 하면 열받아 한다. 생활스포츠 지도사 자격증 연수를 받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생각을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왜 몸을 움직이면 놀림받고, 시험 성적이 잘 나오면 부러움을 샀지? 태어나 보니 몸을 잘 움직이는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고, 글을 읽는 것은 한 번도 어렵지 않았다. 학교에서 나는 체육시간을 ‘헐어’ 자습을 했고, 운동을 원래 잘해서 운동부가 된 애는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30대가 다 되어서야 여성학을 공부하며 몸을 둘러싼 불평등 구조를 이해했고, 사교육 기관·헬스장에서 운동을 배웠다. 일반인, 특히 소수자에게 생활체육이 어떤 의미인지를 자문하며 몸의 감각이 달라지며 보이는 것을 탐구했다. 이거 엄청 재밌잖아? 나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이 운동할 수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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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미쳤다’가 정체성이 될 수 있나? MBTI 성격 검사가 유행이다. 모두 자신을 네 글자로 설명하는 열풍 속에 이 테스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유형조차도 하나의 유형이다. 여기까지 쓰면서 이런 사람들이 칼럼을 읽다 덮어버릴까 봐 걱정했다. 또 그 타령이야, 하고. 하지만 그들은 ‘비과학적’ 테스트로 인간을 열여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말하고 싶은 욕망에 추동돼 읽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실은 내가 이 현상을 나쁘지 않게 보는 이유도 결이 같다. 한국인들에게 인간을 열여섯 가지 다른 부류로 볼 수 있게 한다는 점이다. 한국인은 딱 두 가지로 분류된다. 성실하고 말 잘 듣고 튀지 않는 유형과 여기서 벗어난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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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나를 열어 남들에게 드러내기 이 지면에 계급과 젠더의 교차 지점 문제들에 대해 쓴 지 2년 반이 됐다. 젠더 문제가 헛된 논의로 빠지는 현상은 다음 노래 가사로 꽤 설명이 된다. “여자인 내가 여자의 삶에 대해서 얘길 하는데/ 당신은 김어준 얘길 듣고 와서 입을 열려 하네(신승은 ‘당신은’).” 빈곤, 복지 문제도 비슷하다. 그런 걸 안 받아도 되는 사람들은 많이 말한다. 그걸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말문이 막힌다. 지난 원고를 살펴보면 그간 이 문제를 다루고 싶었던 것 같다. 이 글의 초고엔 20대인 동생이 수급자로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절실한 상황인데도 보증금 대출을 못 받은 얘길 썼다. 사람들이 안 믿을까 봐 사업명과 서류명을 세세히 확인했다. 모두 지웠다. 결국 우리가 노숙을 하게 되지 않은 이상, 힘없는 이야기일 게 분명하니까. 사회적 소수자 문제에 대해 핵심 논의를 막는 마법의 문장이 있다. “○○ 중에 양심 없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인데?” 그 순간 논의는 엉망이 되고, ‘무자격자’를 색출하자는 여론이 갑자기 커진다. 정부는 전수조사를 해서 ‘낭비’를 막겠다고 달려들고, 사정이 있는 사람들은 더 숨죽인다. 그러다가 누군가 굶어 죽거나, 물에 빠져 죽어 발견되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왜 ‘불쌍한’ 사람을 미리 찾아내지 못했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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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할 말이 없다 “그냥 말을 안 하죠. 매년 합계출산율 떨어지는 거 보면서 ‘해냈구나’ 이렇게 생각만 해요.” ‘우리’끼리 만나면 하나같이 비슷한 소리를 한다. 이해가 간다. ‘저출산’에 대해 말해달란 요청을 종종 받는다. ‘인구’ ‘저출산’ 들어가는 현수막을 건 기념사진에 ‘양복남’만 주르르 등장하면 강의 자료가 돼 버린단 걸 아는 머리가 있는 경우 젊은 여자를 찾는 것 같다. 이런 문제와 세트인 ‘다양한 가족’ 문제도 말해줄 ‘당사자’를 못 찾아 야단인 듯하다. 그런데 나도 안 나가니까. ‘할 말이 없다’는 건 이런 느낌이다. 나는 이미 말을 다 했는데 왜 이게 또 리셋됐지? 오류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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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월드컵대교 자전거도로는 언제? 서울중심주의와 학벌주의가 내 등을 떠밀어 서울로 오게 되었다. 서울에 살게 되며 가장 놀란 건 버스와 지하철에 사람이 너무 많고, 차가 너무 밀린다는 것이었다. ‘지역’ 출신의 보편적인 경험이다. 서울에 부모의 집도, 부모가 얻어 주는 집도 없는 처지로 떠돌면서 가는 데마다 일할 곳을 찾았다. 약 10년 동안 서대문에서, 당산에서, 강남구청에서, 공덕에서 다시 서대문으로 옮겼다. 그때마다 버스정류장과 지하철역의 위치, 그 동네에 다니는 노선에 따라서 이게 같은 서울인가 싶었다. 자기 동네가 서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답답했다. 그래서 사회학적 관점이 들어간 페미니스트 지리학 연구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한 국가와 도시의 교통 인프라는 정말로 많은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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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키울 자격 고양이는 귀엽다. 이 고양이는 추상적인 고양이다. 따끈하고 털이 많고 눈이 동그란 것. 그런데 누군가의 삶에서 종종 고양이는 대체 불가능한 고양이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앗, 저 사람 얽혀버렸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를 고양이로부터 한 발 뒷걸음질쳤다. 인간은 자신과 동물이 완벽히 다르다는 관념, 실제로 완전히 다른 것으로 취급되는 구조 속에 살아간다. 동물은 일방의 ‘관리’가 필요하다. 그러니 인간이 모든 것을 장악해야 한다고 믿는다. 동물을 잘 돌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결은 유사하다. “키울 자격이 안 되면 데려오지나 말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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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김치도 한복도 아닌 한국적인 것 최근 머릿속을 꽉 채우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한국은 도대체 왜 한국이 되었을까?’ 그러니까, 다른 것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것’은 무엇일까? 김치나 한복으로 한국을 소개하는 것은 외국인 대상의 한국어 초급 교재 정도다. 한국 땅 밖에서 실제로 만난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면 세 마디 주고받은 후 영원 같은 침묵이 흐를 것이라는 감은 그 누구에게라도 온다. 뒤늦게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봤는데, 제도상 신분제가 폐지된 근현대 시기 외국어 능력이 사회 권력구조 내 개인의 위치를 뒤바꾸는 흐름을 생생하게 그린 부분이 흥미로웠다. 한국이 한국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원가족이 최빈곤층이었지만, 대학 전공을 바꿔 공부 기간을 늘리면서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영문학을 전공하면 어떻게든 먹고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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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경부선엔 위령탑이 있어 새해를 맞아 외국어 공부 루틴을 정비했다. 수험 영어에만 집착하다가, 근 이삼 년 다섯 개 언어를 둘러보며 학습 영역을 넓히고 나니 영어의 무게는 조금 더 가벼워졌다. 그러면서 원어민(백인-미국인)에게 ‘책잡히지 않는’ 발음과 표현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국어를 잘하려면 진짜로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당연한 것들을 낯설게 보며 말하는 연습을 한다. 한편 국제 비교 연구를 읽는 데도 재미를 붙였는데, 차이는 제대로 된 비교를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전제 자체를 깨려면 다른 사회들의 역사적 배경과 현실, 이곳과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지금 내게 외국인에게 한국을 소개하라고 하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경부고속도로엔 위령탑이 있어. 이 고속도로는 세계에서 가장 싼 비용을 들여 가장 짧은 기간에 건설된 도로야. 도로를 만들다가 77명이 죽었어. 우리 엄마는 아직도 어디선가 갑자기 사람이 많이 죽는 걸 ‘사고’라고 생각해. 나는 어쩌다 그런 게 ‘사회적 참사’라고 생각하게 된 이후부터 온 힘을 다해 엄마와 싸웠어. 엄마는 중졸이라 무식해서 뭘 모른다고 화를 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