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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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가족 문제, 자매 문제 자매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는 자매가 있다. 성차별, 나이주의, 가족주의… 이런 것에 ‘반대’하는 것을 페미니즘이라고 배우면서, 우리는 언니, 동생을 떠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말 그대로 부양 관계였다. 동생을 직장에 취직시켜 보증금을 모으게 도와 같이 이사를 다녔다. 평등 선언 후 동생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한없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내 ‘올바르지 않은’ 감정은 숨겨야 하는 것이었다. 왜? 멋지지 않으니까. 선언 이후 우리는 자매 이전에 공동체 가족, 비혼지향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의 일원으로 지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를 “다종다양한 친밀성과 돌봄의 공동체”라고 소개했다. 혼인과 입양, 출산으로만 가족을 만들 수 있는 현실을 ‘운동적으로’ 비판했다. 그 과정에서 남들은 우리 둘이 자매라는 사실을 잘 모르게 되었다. 거기 탈혈연 공동체죠? 결국 어떤 이야기는 갈 곳을 잃고 떠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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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전체를 보는 눈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예를 들어 지나가던 시민이 노숙인에게 외투를 벗어 주는 장면을 포착한 미담 기사 댓글창을 보면 불쾌했다. 감정을 설명하고 싶어 ‘전체를 보는 눈’을 길러 왔다. 한국 사회 전체가 어떻게 구성돼 있는지 조망하고, 그 안에서 나와 남들의 위치를 가늠해 보는 것이다. 그 결과 이해했다. 공감이 만들어지는 방식, 흘러가는 방향은 사회 구조를 반영한다. 공감 능력은 중요하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공감 말고, 정확하고 공정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공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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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위험하니까 꼭 조심히 들어가 얼마 전 미처 서른네 살이 되지 못하고 친구가 죽었다. 여태껏 살면서 나는 대부분의 위기 상황에서 제법 의연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 누군가 맞거나 병에 걸리거나 실종되거나 유치장에 가거나 신용불량자가 되거나 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그런 걸 해결하려다가 이런저런 기관에 신고해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수사관이나 무슨 전문가와 기싸움을 하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아이라고 느낀 적이 없고, 이젠 나이도 그럴듯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장례식장엔 어떤 사람이 가야 하는지, 거기선 누가 얼마나 슬퍼해야 적절한지는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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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라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가만히 놔두면 죽어가는 것을 돌본 적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아는 한 중년 여성 활동가는 가족에 대한 금기를 부수며 살아온 반골이다. 그런 그가 일을 너무 많이 하다 아기를 먹이지 못하는 바람에 아기가 한없이 작고 말라지는 꿈을 꾼다는 얘길 듣곤 종종거리며 돌본 적 있는 사람의 무의식이란 비슷한가 보다, 했다. 작고 약한 사람, 동물을 잘 먹이지 못하거나 실수로 떨어뜨려 죽여버리고 진땀을 흘리는 꿈을 자주 꿨다. 내게 세상은 이 불안을 이해하는 ‘우리’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 사회는 후자가 지배하는데, 그게 나의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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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자기 돌봄 언젠가 휴대폰을 바꿨더니 걸음 수를 측정하는 기능이 생겼다. 나의 하루 걸음 수가 연령, 성별 코호트 내에서 상위 몇 %인지도 알 수 있었다. 이것 때문에 요새 꽤 많이 걷는다며 친구에게 화면을 보여주니까, 이렇게 대답했다. “다른 20대 여자들은 다 헬스장 가서 뛰고 있을걸?” 내 아르바이트 수입으로 그런 데는 갈 수 없었다. 역세권 임대주택을 찾다 서울 강남에 산 적이 있다. 한국에서 복지제도의 ‘수혜’를 받으며 느낀 건 온통 모멸감뿐이라 뭐든 되도록 사설 기관에 다니고 싶어했지만, 강남 사람들은 달랐다. 먼저 직장생활을 시작한 동생이 그걸 알아챘다. 우리는 함께 주민센터 헬스장에 갔다. 중년 남성 트레이너가 시키는 대로 따라했는데, 등 근육을 제대로 끌어내릴 줄 안다는 칭찬을 받았다. 제대로 된 운동복도 없어 어색했지만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던 차에 “근데 이런 거 많이 하면 여자들은 빨리 늙어요. 되도록 안 하는 게 좋지” 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다신 운동을 가지 않았다. 빈곤 계급과 여성 젠더의 교차 지점에 놓인 내 몸은 번번이 소외됐고, 그 후의 이야기는 뻔했다. 얼마 전 다른 친구는 내 20대를 이렇게 요약했다. ‘쟤는 왜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운동도 안 하고 힘들다고만 하지?’ 친구는 그때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다 개인의 자유가 있으니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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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어린이와 친구로 지내기 친구들을 만나러 전북 전주에 다녀왔다. 내 친구들은 나이도, 서로 호칭도 들쑥날쑥하다. 열한 살 은서 어린이는 두 번 돌아 띠동갑인 나를 ‘홍혜은 언니’라고 부르고,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인 친구들은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신규로 교수 임용된 은서의 아버지와 대학원생인 나는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뭐 어때? 우리는 다양하고 이상한 가족으로 살아간다. 기나긴 코로나19 시기를 거쳐 만났더니, 전엔 너무 어리고 낯을 가려 아빠 뒤에 숨던 은서 동생 은조도 여자 어른을 보면 손을 잡고 다니고 싶어 하는 어엿한 어린이가 되었다. 원래 나를 만나면 같이 다니곤 하던 은서는 당황한 눈치였다. 내 반대편 손엔 짐이 들려 있었고, 은서는 상황을 살피더니 은조에게 “아빠 손을 잡는 건 어떠냐”고 협상을 걸었다. 어른에게 판단을 넘기지만도 않고, 언니의 힘으로 동생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도 않는 은서의 민주시민적 면모에 순간 감동을 받으며 얼른 손을 비워 은서의 손도 잡았다. 일곱 살, 열한 살 어린이의 작고 폭신한 손을 잡고 걸으면서, 어른들로만 가득 찬 일상을 살아갈 때는 좀처럼 쓰지 않는 나의 어떤 감각이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온몸으로 정보와 지식을 흡수해 나가며 빠르게 변해 가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 이제는 내가 당연하게 하고 있는 모든 게 이들의 판단과 선택에 꽤 영향을 주고 있다는 무게감, 그런데 이 세상의 ‘당연한 것’들이 엉망인 걸 알기에 드는 걱정스러움이 동시에 몰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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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자전거와 ‘사회문제’ 열두 살 무렵 내 몸은 작고 날랬다. 담장을 넘어 다녔고, 지붕과 나무에 기어 올라갔고, 계단을 내려갈 땐 열 개씩 건너 뛰어 내려갔다. 그 무렵 자전거도 배웠다. 넘어질 것 같은 쪽으로 핸들을 꺾으면서 가라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잘 이해하지 못하다가, 야트막한 내리막길에서 살살 출발해 봤더니, 약간의 중력을 받아 어설픈 핸들 조작만으로도 넘어지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두 바퀴 위에 몸을 온전히 싣고 미끄러져 나가는 감각은 신비로웠다. 인류 문명의 달콤한 맛. 얼마 후 교복을 맞췄고, 그땐 몰랐다. 교복 치마가 제약하는 범위에 몸을 맞춰 길들이고 향후 20년쯤 나는 자전거와 관계없는 삶을 살게 될 것이며, 해마다 나무를 타는 방법도, 계단을 열 개씩 뛰어서 내려가는 요령과 감각도 점점 잊어서 나중에는 그럴 수 있었던 과거를 전생처럼 느끼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한편 남동생은 교복을 입고부터 자전거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엄마는 얼마 전까지 “사내애라고 자전거로 통학시킨 불쌍한 네 동생”이란 레퍼토리를 반복했다. 차 타면 편한데 땀나고 추워서 싫긴 했겠지, 생각했다. 재작년부터 다시 몸을 움직이는 법을 익히고, 이듬해 7월에만 따릉이를 100㎞쯤 타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맞다, 자전거는 재밌는 거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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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내 마음을 움직인 시의원 후보 진보정당들의 선거 평가가 한창이다. 나는 국민의힘이 강세를 보인 서울시의회 서대문구 지역에서 유일하게 당선된 더불어민주당 시의원 이승미에 대해 써볼까 한다. 서대문구에서 갓 유권자가 된 나는 이승미 의원을 모르고, 이승미 의원은 재선에 도전하는 상황이었다. 공보물을 받아들고, 나는 이 공보물이 딱히 나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음을 느꼈다. 글은 구면인 유권자를 예상 독자로 삼았고, 특별한 정치 입문기나 자기 소개를 생략했다. 그럼에도 흥미를 가진 건, 배우자와 부친 재산 상황이 ‘해당없음’이고, 여성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엄마처럼” “며느리처럼”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보의 재산도 비싼 아파트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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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차별금지법과 트랜스젠더 미류, 이종걸 두 활동가가 차별금지법 4월 내 제정을 목표로 밥을 굶으며 ‘투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벌써 5월 중순이다. 여론 지형을 살필 때 구글 알고리즘이 어떤 정보를 상단에 띄워 주는지를 본다. ‘차별금지법’을 검색하니 취지는 이해하지만 다른 의견도 들으며 가야 한다는 중앙일보 논설위원의 칼럼이 상단에 있다. 맞다. 유별나게 ‘성소수자 반대’를 외치며 부채춤을 추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보통 사람’이라, 차이가 있는 사람들과 여러모로 접점을 만들고서야 내가 편협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 많았다. 다른 생각이 궁금한 누군가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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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당사자성이 다가 아니라는 말 우리는 어떻게 태어날지 모르고 태어난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 든 패가 ‘꽃놀이패’일 수도, ‘개패’일 수도 있다. 사회계약론의 기본 아이디어다. 내가 어떤 위치에서 살아가게 될지 모른다면, 어디에서 시작해도 불리하지 않은 사회가 좋은 사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공정을 원한다. 문제는 이미 불공정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다. 우선 내가 경험하는 불공정을 모두가 말해 보는 것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걸 제대로 말하기 위해서는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남들이 뭘 경험하고 사는지를 알아야 무엇이 특권이고 차별인지 알 수 있다. 온통 ‘나’뿐인 진공관의 세계 안에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옳은 주장을 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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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페미니스트 정치의 미래 대선이 끝났다. 페미니스트 후보임을 한 번도 부정하지 않고 선거를 치른 심상정 전 후보가 받은 표는 2.37%였고, 그보다 적은 표차로 결과가 갈렸다. 이재명 캠프는 ‘남혐·여혐싫어위원회’ 같은 것을 만들었다. 윤석열 전 후보는 성별을 갈라쳐 온 정치인 이준석을 전면 기용했다. 윤석열 당선인의 ‘신승’ 원인을 “20대부터 50대까지 여성표는 전멸”한 데서 찾는 분석이 나왔다(매일경제 3월10일 보도). 이재명 전 후보 측 전략 중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선거 막판 ‘추적단 불꽃’ 박지현 활동가의 기용이었다. 여론조사 공개 기간이 끝난 시점이었으나 주변의 여론이 빠르게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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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저출생, 취약한 이들의 멸종 2021년 3분기의 출산율은 0.82명으로 또다시 역대 최저를 갱신했다. 많은 이들이 저출생 현상을 한국인의 멸종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현상을 한국에 사는 취약한 이들의 멸종으로 본다.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 발표된 후 몇몇 언론이 나서 관련 예산이 점점 커지고 낭비되는 것이 문제라는 여론을 형성했고, 이를 방어하는 측은 기존 대책마저 없었으면 인구는 더욱 감소했을 것이고, 기혼 부부 내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늘어났기에 효과가 있었다고 반론한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이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