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이 없다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그냥 말을 안 하죠. 매년 합계출산율 떨어지는 거 보면서 ‘해냈구나’ 이렇게 생각만 해요.”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우리’끼리 만나면 하나같이 비슷한 소리를 한다. 이해가 간다. ‘저출산’에 대해 말해달란 요청을 종종 받는다.

‘인구’ ‘저출산’ 들어가는 현수막을 건 기념사진에 ‘양복남’만 주르르 등장하면 강의 자료가 돼 버린단 걸 아는 머리가 있는 경우 젊은 여자를 찾는 것 같다.

이런 문제와 세트인 ‘다양한 가족’ 문제도 말해줄 ‘당사자’를 못 찾아 야단인 듯하다. 그런데 나도 안 나가니까. ‘할 말이 없다’는 건 이런 느낌이다. 나는 이미 말을 다 했는데 왜 이게 또 리셋됐지? 오류났나?

나는 끈질긴 편이다. 불과 지난해까지 젊은 여자들이 모여 돌봄(‘저출산’이 아니다) 얘기를 하는 자리에서도 세금, 정책 타령을 했다. 세금은 상호부조의 재원이고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대안’이 어렵다. 결국 이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건 계급 문제다. 뭐 그런 얘기. 젠더와 계급이 교차하는 문제는 쌓였으니 그 자리를 나서고 잊어버렸는데 요즘도 그때 그 얘기가 인상 깊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러면서 들은 얘기다.

“국가에 요구를 안 하게 되는 게 왜인지 생각해봤어요. 집에서 아빠한테 말 안 하는 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어차피 안 통할 거니까요. 해답은 아니어도 설명은 되지 않나 싶어요.”

올해 ‘저출산’에 대해 시끄럽게 떠든 남자들은 이렇다. 마이클 크레이머 시카고대 교수(하다못해 미국 남자 교수가?), 조정훈 시대정신 의원, 오세훈 서울시장…. 이들이 입을 모은 ‘저출산’ 대책은 외국인 가사도우미, 가난한 나라의 여자들을 데려다 현대판 ‘식모살이’를 시키겠다는 것이었다.

회사에선 여자가 육아휴직을 하니 여자를 안 뽑는다는데, 문제는 여자가 아니다. 남자가 집에서 사라지는 거다. 육아휴직으로 안 되는 문제가 산더미다. ‘애’가 ‘시민’으로 자라는 데는 연속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야근처럼 ‘땡겨서’ 끝낼 수 없다는 것. 사람은 집에서도 할 일이 있는데, 누군가 그걸 처리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없어진다는 것.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인은 일만 하다 병들고 집에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집값도 비싼데. ‘아버지’는 무엇인가? 영화 클리셰로 아이의 추억 사진에 아빠 얼굴이 하나도 없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엄마도 추억 사진에서 없애버리겠다?

뭐 어째도 상관없을 수 있다. 피곤한 여자들은 아이를 안 낳을 테니까. 그런데 친구는 페미니즘을 더 공부하지 않게 된 이유를 “아는 게 많아질수록 숨이 막혀서”라고 말했다. 여성학을 연구하며 실제로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이미 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 사이엔 끔찍한 신분 격차가 있다. 차별이 촘촘하게 상식화된 나라. E-9 취업 비자 문제는 이미 가관이다. 돌보는 여자가 국적에 따라 신분이 나뉘고 남자는 관전하는 디스토피아에 살고 싶지 않아 이 글을 쓴다.

임신, 출산, 육아를 포함한 재생산 권리에 대해 설명할 때 ‘관계적 자율성’이란 개념을 쓴다. 여자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런데 그 권리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발생한다. 그들은 사회적인 책임을 버리고, 가난한 여자들한테 떠넘기려 한다. 우리는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들이 듣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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