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라니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가만히 놔두면 죽어가는 것을 돌본 적 있는지 궁금하다. 내가 아는 한 중년 여성 활동가는 가족에 대한 금기를 부수며 살아온 반골이다. 그런 그가 일을 너무 많이 하다 아기를 먹이지 못하는 바람에 아기가 한없이 작고 말라지는 꿈을 꾼다는 얘길 듣곤 종종거리며 돌본 적 있는 사람의 무의식이란 비슷한가 보다, 했다. 작고 약한 사람, 동물을 잘 먹이지 못하거나 실수로 떨어뜨려 죽여버리고 진땀을 흘리는 꿈을 자주 꿨다. 내게 세상은 이 불안을 이해하는 ‘우리’와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로 이루어진 곳이다. 이 사회는 후자가 지배하는데, 그게 나의 공포다.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요즘 공포스러운 장면들이다. 지난 6일 윤석열 정부는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인구가족양성평등본부를 설치하겠다는 개편안을 발표했다. 지난달 오세훈 서울시장은 홍콩과 싱가포르처럼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싼값에 도입하는 게 아이 ‘때문에’ 일과 경력이 포기되지 않게 하는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청년의 이름으로 ‘지방 총각들’에게 “퇴근해 현관문 여는 순간 미소로 맞아줄 아내와 아이”가 필요하다는 칼럼을 게시했다. 시절이 하수상한데, 주변은 화를 내기도 지친다는 반응이다. 이 모든 게 거대한 농담 같다.

인구와 가족이라니. 여성이 일과 경력을 아이 ‘때문에’ 포기한다는 설명틀, 계급적 상향 이동을 하면 ‘가족’이 선물처럼 주어질 거란 믿음 모두 그들만의 것이다. 우리가 돌보는 존재에게서 눈을 떼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우리에게만 있는 게 문제란 사실을 왜 말하지 않을까? 이 모든 게 그들에게 기업과 국가의 돈줄인 ‘인구’가 사라지는 문제이기만 할 때, 우리에게는 더 넓고, 깊고, 그래서 말하다 지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아내와 더 취약한 여성에게 돌봄을 맡길 그런 가족을 꿈꾸는 남성, 정치인, 언론인들 ‘때문에’ 세상이 좋아지질 않는다.

돌봄은 어렵지만 그걸 통해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도 한다. 아픈 식구를 혼자 24시간 지켜볼 수 없어 어떻게든 돌봄의 관계망을 만들어야 했다. 남이 나만큼 할 수 있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믿을 수 없어 혼자 아득바득해 보려 했지만 가능하지 않았다. 신뢰와 능력에 대한 모든 기준을 갈아엎으면서 난장판을 통과했다. 그때 익힌 관계와 소통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요령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오 시장이 ‘모범 사례’로 꼽은 홍콩에선 외국인 돌봄노동자들이 코로나에 걸리자 해고되어 거리로 내몰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돌봄을 탐구하며 부담을 나누는 것과 ‘외주화’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는 감각을 확신하게 된 사건이다. 로이터의 올해 2월 기사는 2005년부터 일해 온 돌봄노동자가 한겨울 음식과 쉴 곳을 구할 수 없어 절망하는 인터뷰를 담고 있다. 홍콩과 싱가포르 ‘출산율’도 세계 최저 수준이다. 당연하지 않나?

양성평등이라니. 젠더는 평등과 정의를 다시 사유하기 위한 사회적 분석틀이다. 우리는 사회 주류인 그들과 일부 여성 간의 부당한 평등이 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머리가 아프다. 그런 평등은 여성의 과로사라, “여성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농담하면 이 가족을 그냥 둔 채 돈 주고 ‘아내’를 사 오자고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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