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와 친구로 지내기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친구들을 만나러 전북 전주에 다녀왔다. 내 친구들은 나이도, 서로 호칭도 들쑥날쑥하다. 열한 살 은서 어린이는 두 번 돌아 띠동갑인 나를 ‘홍혜은 언니’라고 부르고,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인 친구들은 ‘삼촌’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신규로 교수 임용된 은서의 아버지와 대학원생인 나는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뭐 어때? 우리는 다양하고 이상한 가족으로 살아간다.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기나긴 코로나19 시기를 거쳐 만났더니, 전엔 너무 어리고 낯을 가려 아빠 뒤에 숨던 은서 동생 은조도 여자 어른을 보면 손을 잡고 다니고 싶어 하는 어엿한 어린이가 되었다. 원래 나를 만나면 같이 다니곤 하던 은서는 당황한 눈치였다. 내 반대편 손엔 짐이 들려 있었고, 은서는 상황을 살피더니 은조에게 “아빠 손을 잡는 건 어떠냐”고 협상을 걸었다. 어른에게 판단을 넘기지만도 않고, 언니의 힘으로 동생을 억지로 움직이게 하지도 않는 은서의 민주시민적 면모에 순간 감동을 받으며 얼른 손을 비워 은서의 손도 잡았다. 일곱 살, 열한 살 어린이의 작고 폭신한 손을 잡고 걸으면서, 어른들로만 가득 찬 일상을 살아갈 때는 좀처럼 쓰지 않는 나의 어떤 감각이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온몸으로 정보와 지식을 흡수해 나가며 빠르게 변해 가는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 이제는 내가 당연하게 하고 있는 모든 게 이들의 판단과 선택에 꽤 영향을 주고 있다는 무게감, 그런데 이 세상의 ‘당연한 것’들이 엉망인 걸 알기에 드는 걱정스러움이 동시에 몰려 왔다.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페미니즘이다. 하지만 카페와 밥집을 거쳐 술집으로 향하는 길에 어린이는 집에 돌아가야 했다. 은서는 몹시 아쉬워했지만, 다음에 나를 보러 오겠다는 약속을 직접 할 수 없었다. 양육자에게 “서울에 꼭 데려가 달라”고 먼저 부탁을 해야만 하는 은서를 보면서, 이 어린이가 경험하는 사회가 믿음직하고 안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우정이 유지되려면 서로의 진심에 더해 어른인 쪽의 충분한 책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이 사회에 이런 걸 모르는 어른투성이인 것이 걱정이다.

교육부는 지난달 29일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만 5세로 낮추겠다는 학제개편안을 내놓았다. 이는 ‘저출생’을 해결하기 위해 1년 빨리 노동 인구를 만들어 내겠단 계산이다. 이 정부는 어린이들이 빨리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 완제품이 되어 ‘시장’으로 나가기를 원하는 것 같다. 공교롭지 않게도 몇 해 전 보건사회연구원의 경제학자는 청년들이 취업·결혼 ‘시장’에 늦게 들어오는 것이 저출생의 원인이라고 지목하며 학생 시기를 길게 가지면 불이익을 줘야 한다고 했다.

살면서 겪은 온갖 부당하고 위험한 일은 몰려서 결정해야만 할 때 일어났다. 주변에 남동생을 비롯해 고졸 취업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한탄 없이 들을 수가 없다. 산업재해, 성폭력, 인격적 모독…. 이것은 이들이 빨리 취업하지 않아 일어난 일이 아니다. 나와 내 가난한 친구들이 빨리 돈을 벌어야만 해서 수모를 겪어 온 세상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사법 시험을 9년 동안 준비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어떤 영역에 큰일이 났다는 걸 아는 감각, 그것이 어린이와 함께 살기 위해 어른이 갖춰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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