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자취 아로새겨진 자연유산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고규홍의 큰 나무 이야기] 역사의 자취 아로새겨진 자연유산

충북 제천 송학면 무도리 서문마을에 들어서려면 먼저 마을 동쪽을 둘러싼 낮은 산을 바라보아야 한다. 고려 패망의 역사를 담은 왕박산(王朴山)이다. 이곳으로 피신한 고려 왕족은 성을 박씨(朴氏)로 고치고 은둔했다. 왕족이 박씨로 성을 갈았다 해서 왕박씨, 그 뒷산을 왕박산이라고 불렀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추강냉화(秋江冷話)>에 전하는 이야기다.

고려 패망과 조선 건국의 역사가 어른거리는 마을 어귀에는 아름다운 소나무가 있다. 나무나이 600년, 나무높이 13m, 가슴높이줄기둘레 4.6m의 큰 나무다. 오랜 연륜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잃지 않았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나무다. 제천시의 큰 나무 가운데에 첫손에 꼽는 대표 노거수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서낭당나무이자 정자나무로 살아온 ‘제천 무도리 소나무(사진)’에서의 서낭제는 여전히 이어진다. 아쉽게도 문헌이나 구전 기록이 없어, 나무와 관련한 고려 왕족의 직접적인 사연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600년이라는 나무나이는 패망한 왕국의 왕족이 은둔의 보금자리를 튼 시기와 맞아들어간다. 나무에 담긴 역사의 흔적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세월의 흔적을 묻은 채 ‘제천 무도리 소나무’에 봄빛 무르익어가는 이즈음 ‘자연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다.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협약 기준에 맞추어 우리 자연유산 관리 체계를 정비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셈이다. 새 법률에 따르면 자연유산을 “자연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조성된 문화적 유산” 혹은 “역사적 경관적 학술적 가치가 담긴 자연 및 역사문화경관”으로 규정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생물학적 가치를 넘어서 역사 인문학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세계적 흐름에 따른 일이다. 새 법률 제정을 계기로 우리 곁의 큰 나무와 관련한 역사 인문학적 가치를 제고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어도 ‘제천 무도리 소나무’는 필경 우리 역사의 큰 자취를 간직한 나무일 수 있다. 새로 제정한 법률의 기준으로 다시 돌아보게 되는 귀중한 자연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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