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민영
논설위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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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단도직입 “몸의 한계 넘어서는 발레의 기쁨 …나만의 춤 만들 경험이 중요” 1968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고교 3학년이던 1986년 유니버설발레단 <지젤>의 엑스트라로 출연했다가 발레를 배워보라는 권유에 연수생으로 입단하고, 이듬해 오디션에 합격해 정단원이 됐다. 1998년 부상으로 인해 발레단을 그만둘 때까지 공연무대에 560회 섰다. 이후에도 발레 <심청>의 심봉사 역을 비롯해 다양한 캐릭터 연기로 참여해왔다. 2002년 국내 최초의 취미 발레 학원인 ‘발레조아’를 서울 신촌에 열었다. 최근 성인 취미 발레생들로 구성된 ‘김현우발레단’ 21주년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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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갈매기 호텔 ‘갈매기 호텔’이 지난 3월 잉글랜드의 작은 항구도시인 로위스토프트에 문을 열었다. 3개 동에 430쌍이 머물 수 있다. 주 고객은 발이 검고 작은 세가락갈매기다. 한국에도 겨울 철새로 들르는데, 1970년대 이후 기후위기와 먹잇감 감소로 개체군이 40%나 줄어들어 2017년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 ‘취약’ 등급으로 올라있다. 호텔은 이곳 해상에 풍력발전 설비를 지으려는 민간전력사들이 지었다. 절벽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는 세가락갈매기의 서식이 교란될 것에 대비했다고 한다. 호텔이라지만 사실상 이재민 시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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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헤이그 아동입양 협약 고백건대 부끄러운 일이다. 과거 성공한 해외입양인 기사를 작성하며 문제의식이 없었다. 선진국이 더 나은 환경과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뿌리가 잘린 아이가 인종도 문화도 다 이질적인 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 어떤 고통인지 헤아리지 못했다. 해외입양 신화는 ‘한민족’과 ‘정상가족’에 집착한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편리한 허구였다. 6·25전쟁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GI 베이비(미군과 한국인 사이 혼혈아)를 미국에 많이 보내는 게 최고의 복지사업”이라고 했을 정도다. 1960~1970년대에는 혼외출산이나 빈곤가정의 아이들을 내보냈고, 1990년대 민주화 이후에는 비혼모가 낳은 아이들이 대상이었다. 이렇게 70년간 20만명의 아이들이 1인당 수천달러 수수료에 ‘수출’됐다. 1984~1988년엔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 1% 이상이 국제선 여객기에 실렸다고 한다. 국가는 약자를 위한 복지정책을 외면했고, 입양은 산업화됐다. 민간기관들이 수수료를 챙기려 부모 있는 아이도 고아로 서류조작했다는 혐의까지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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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예능의 윤리 나만 옳다고 고집하면 반발을 산다. 상대방의 생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도덕적으로 ‘멸균된 세상’을 지향하면 자칫 다양성과 창의성을 잃게 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문화콘텐츠의 옳고 그름에 대해 섣불리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하나의 원칙만은 지켜져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도구화하는 콘텐츠는 용납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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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낚시 면허 아버지는 요즘도 봄이 오고, 가을 지날 때 낚싯대를 메고 조용한 물가를 찾아 낚싯줄을 드리우신다. 운수 좋은 날엔 별미 붕어찜이 밥상에 올랐다. 빈손인 날도 괜찮았다. 마음을 내려놓고 자연과 교감하는 데 낚시만 한 취미가 없는 듯했다. 낚시예능 <도시어부> 인기에 바다로 출조하는 인구도 크게 늘며 낚시 인구가 이제 100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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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원전제로’ 독일 독일은 ‘원전 후발주자’다. 1957년 서독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만 동참하겠다는 ‘괴팅겐 선언’을 하면서 독일 내 원전건설의 시동이 걸렸다. ‘오일쇼크’가 있던 1973년에는 1차 에너지 계획을 통해 원자력 비중을 14%까지 높이고 원전 40기를 짓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1975년 주민들이 뷜 원전 건설 예정부지를 점거하자 대규모 경찰 병력이 물대포를 쏘며 폭력 진압한 사건을 계기로 반대운동이 본격화됐다. 반민주적 원전 정책에 반발하며 전국에서 모인 시민 2만8000명이 9개월간 점거 시위를 벌이며 연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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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직지의 ‘타향살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인 불조직지심체요절(직지)이 1377년 인쇄된 곳은 충북 청주 흥덕사다. 제작 비용을 전담한 이는 ‘묘덕’이라는 법명의 비구니로 전해진다. 왕실이나 문벌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 그는 이듬해 여주 취암사의 직지 목판본 간행 비용도 시주했다. 역대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을 모은 직지의 원작자는 고려 말 승려인 ‘백운화상’ 경한이다. 54세의 늦은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가 불교를 배운 그는 다양한 수행법을 포용하며 무심(無心)한 경지에 오르는 것을 강조했다. 공민왕이 왕비 노국 공주를 기리려 창건한 흥성사 주지를 지낸 그는 ‘이르는 곳이 모두 돌아갈 길이요, 만나는 곳이 모두 고향’이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입적했다. 이후 제자인 석찬과 달잠이 스승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려 금속판본 작업에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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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단도직입 “학폭의 최대 문제는 학부모…교사에게 더 많은 권한 줘야” 국책연구기관인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의 학교폭력 예방 전문가다. 학교폭력예방교육지원센터장을 지내며 학폭 예방 어울림 프로그램 개발의 연구책임자로 일했다. 숙명여대에서 아동복지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교육전문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현재 교육부, 여성가족부, 행정안전부의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취약계층 청소년 지원정책 진단 및 제도 보완 연구’ ‘학교 밖 청소년 이행경로에 따른 맞춤형 대책’ 등을 연구했고, <온라인 게임과 청소년의 삶>을 썼다. 2017년 정보 문화 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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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청부살인 영화 <길복순>의 배경은 청부살인 대기업 ‘MK엔터’이다. “살인 한 번이면 참을 인(忍) 세 번을 면한다”고 회사 대표는 말한다. 킬러들은 기존 <레옹> <존 윅>을 비롯한 대중문화 상품에서처럼 미화된다. 그러나 돈과 살인이 교환되는 위험천만한 실제 현실은 비루할 뿐이다. 청부살인 의뢰인들은 상대방만 세상에서 없어지면 문제도 사라질 것으로 여긴다. 1996년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서 대낮에 주부가 피살된 사건은 50억원의 위자료를 놓고 이혼소송 중이던 재력가 남편이 국제 갱단에 사주한 경우였다. 2002년 한 중견기업 회장의 부인이 망상에 빠져 무고한 사돈 조카 이화여대생을 공기총으로 살인토록 교사한 사실은 피해자 유족의 끈질긴 조사 끝에야 뒤늦게 드러났다. 2014년에는 금품수수 사실이 폭로될 것을 우려한 현직 서울시의원이 재력가의 살인을 교사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2018년 부산 해운대에서 발생한 70대 노인 강도피살 사건은 돈문제로 남편과 다툰 부인이 지인에게 살인을 청부한 것으로 드러났다. 3년 사귄 여자친구를 “집착이 심하다”며 청부살인한 남성이 술자리에서 떠벌려 붙잡힌 경우도 있다. 대다수의 청부살인은 갈등 해결 능력이 턱없이 미숙한 이들로부터 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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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노옥희·천창수 ‘부부 교육감’ 지난해 12월 심장마비로 별세한 노옥희 전 울산시교육감의 남편인 천창수 후보가 5일 울산교육감 보궐선거에서 61.94% 득표율로 당선했다. 사상 첫 부부 교육감이다. 조용한 외조자였던 그는 아내가 못다 이룬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개혁을 이어가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고 한다. 유권자는 이에 압도적 지지율로 답했다. 노동운동가이자 교사 출신인 천 당선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1978년 유신체제를 비판하다 고문·수감된 이력 때문에 1982년 서울대 사회교육과 졸업 이후에도 교직 발령을 받지 못했다. 이에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이듬해 울산 현대중전기에 취업했다. 1984년 대형 산재를 당한 제자의 사건을 조사하던 현대공고 교사 노옥희를 만나 도움을 주면서 가까워졌다. 1989년 결혼 일주일 전에는 사측의 노조탄압 테러로 심한 허리부상을 입어 고생했고, 부부 모두 해직자였던 신혼 때에는 신문배달을 함께 하며 생계를 겨우 유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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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광주가 품어준 전두환 손자 혈육의 끔찍한 과거 범죄를 직면했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유태인 학살을 주동한 나치 게슈타포의 수장 하인리히 힘러의 딸 구드룬은 일생을 ‘나치즘의 공주’로 살았다. 그는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던 아버지가 저지른 일들에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역사를 외면했다. 반면 나치 치하 폴란드 총독으로 강제수용소를 운용했던 한스 프랑크의 아들 니클라스는 언론인으로서 부친의 과거 행적을 파헤쳤고, “아버지는 권력에 눈이 먼 기회주의자였다”고 책으로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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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외국인 가사도우미 1960년대 서울에서는 두 집에 한 집꼴로 ‘식모’를 두었다. 건축업자들은 집을 지을 때 주방 옆에 식모가 기거하는 조그만 방을 따로 만들기도 했다. 가난한 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상경한 어린 여성들은 낮은 보수에 손빨래를 하며 삼시세끼를 차렸다.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처럼 돌봄노동도 했다. 24시간 호출 대기 상태로 제대로 자지도 쉬지도 못했다. 계를 들어준다는 미명하에 임금을 떼이는 건 다반사였고, <영자의 전성시대>처럼 성폭력 피해를 입고 쫓겨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