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제민
논설위원
사회부 데스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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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대학가 반전시위 미국이 참전한 전쟁이 없는 시기에 치러지는 미 대선에서는 외교 문제가 유권자 표심에 결정적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경제, 불평등, 인종, 임신중지 등 미국 국내 문제가 더 중요하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올해 선거에서는 그런 공식이 깨질지도 모르겠다. 대학생들의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가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시작돼 다른 대학들로 확산되고 있다. 그것을 보면서 1968년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를 떠올리게 된다. 56년 전 조부모 세대와 달리 지금 대학생들의 친구·형제가 전장에서 죽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자신의 대학이 이스라엘군이 쓰는 무기 사업에 투자하고, 자신들이 지지한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지원하는 데 도덕적 분노를 느낀다는 점에서는 그때와 비슷하다. 가자지구의 참상을 시시각각 접하면서 자신들이 공범이 되고 있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다. 1968년의 대학생과 2024년의 대학생은 기성 체제에 대한 분노와 항의를 연결고리로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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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소박한 자유인’ 홍세화 홍세화(1947~2024)를 세상에 알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1995)에서 개똥 세 개 이야기를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 그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이야기는 그가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게 들은 일화에서 비롯됐다. 서당 선생이 3형제에게 장래희망을 묻는다. 서당 선생은 ‘정승’이 되겠다는 맏이, ‘장군’이 되겠다는 둘째를 칭찬하며 막내를 쳐다본다. 막내는 장래희망을 말하는 대신 ‘저보다 글 읽기를 싫어하는 큰형에게 개똥 세 개 중 하나를, 저보다 겁이 많은 둘째 형에게 개똥 하나를 입에 넣어주고 싶다’고 한다. 마지막 개똥은? ‘당연히 서당 선생에게’라고 답한다. 할아버지는 ‘살아가며 세번째 개똥이 서당 선생 몫이란 말을 하지 못하게 될 때, 그때는 네가 그 세번째 똥을 먹어야 한다’고 했고, 어린 홍세화는 수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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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이란·이스라엘의 (그림자) 전쟁 이란과 이스라엘의 사이가 애초 이렇게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팔레비 왕조(1925∼1979) 때 이란은 이스라엘(그리고 미국)과 우호 관계를 가졌다. 이란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이슬람권 국가로는 튀르키예에 이어 두번째로 인정했다. 이란의 1979년 이슬람 혁명 후에도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았다. 양국 관계가 악화된 것은 이란·이라크 전쟁(1980~1988) 후 이란이 레바논·예멘·시리아 등에서 반이스라엘 무장단체를 지원하면서다. 친이란계 무장단체들의 이스라엘 공격에 이스라엘은 이란 요인 암살, 핵시설 사이버 공격 등으로 응수했다. 양국 모두 자신이 했다고 내세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소행임을 부인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두 나라가 ‘그림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점은 시간이 흐르면서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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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대동아전쟁 귀축영미(鬼畜英美)는 일제 말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서 곧잘 듣는 말이다. 일본 제국이 ‘동아시아를 지키기 위해 수행했다’던 그 전쟁의 상대는 ‘악귀와 짐승 같은 나라’ 영국과 미국이었다. 그와 함께 늘 따라오는 말은 대동아(大東亞)전쟁이다. 일본이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참전한 2차 세계대전을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일본이 대동아를 처음 쓴 것은 1940년 2차 고노에 내각의 기본국책요강에서였다. 3년 차에 접어든 중일전쟁의 목적을 대동아공영권에서 찾았다. 중국·조선·대만·동남아시아를 구미 열강의 지배로부터 지켜냄으로써 동아시아 공동 번영을 이루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일본은 1941년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며 이 전쟁을 대동아전쟁으로 명명했다. 대동아는 단지 ‘넓은 동아시아 지역’이라는 지리적 의미가 아니라 지정학적 의미를 담고 있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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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한은 돌봄 보고서가 말하지 않는 것 한국은행이 지난달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 보고서를 공개했다. 돌봄 인력 부족과 비용 부담에 대처하기 위해 이 일을 이주노동자에게 맡기고 임금을 낮추자는 제안을 담고 있다. 경제학자인 한은 총재가 힘을 실어준 이 보고서는 노인·육아 돌봄을 모두 다루는데, 핵심은 노인 돌봄에 있다. 육아 돌봄은 상대적으로 인력 부족이 덜 심각하고 가정과 사회, 국가가 어떻게든 감당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노인 돌봄은 어느 주체도 흔쾌히 떠맡지 않으려는 현실이 보고서에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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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농민 없는 총선 연초부터 과일·채소값이 줄줄이 치솟아 고물가 고통이 길어지고 있다. 도시 소비자들은 아우성치고, 정부가 각종 단기적 대책을 내놓고, 급기야 윤석열 대통령의 ‘대파 한 단 875원’ 촌극까지 벌어졌다. 정부 대응은 875원 하는 대파를 공급하기 위한 납품단가와 할인 지원에 맞춰져 있다. 이러한 지원은 대체로 유통 부문에 돌아가고 생산자인 농민들에게 도달하기 전에 녹아 없어진다. 농민 입장에선 기후위기와 재배면적 감소 등으로 수확량이 줄어 박스당 출하가격이 올라도 전체 소득은 줄어든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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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국회의원’이라는 방탄조끼 4·10 총선에서도 기자, 외교관, 검사 등 현직에 있다가 주요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직행한 사례가 많다. 모든 길은 여의도로 통한다고 해야 할 건가. 그들은 하나같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말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국회의원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도 있을 것이다. 지금 국회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를 떠나서 말이다. 이러한 정치 입문자 대부분은 직업에서 얻는 보상도 적지 않고, 그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해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에 손색이 없는 이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 동기를 배제하기 어렵다고 본다.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든, 복수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말이다. 누구나 정치인 욕을 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국회의원의 사회적 지위를 높게 본다. 한 연구기관의 국가별 직업 인식 조사에서 한국인들은 유독 그런 인식을 보였다. 그럼에도 의문이 다 풀리지는 않는다. 왜 그렇게들 국회의원이 되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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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다양성’이란 말의 오염 다양성(多樣性). ‘모양·빛깔·형태·양식 따위가 여러 가지로 많은 특성’을 뜻한다. 존재하는 세상 자체를 가치중립적으로 묘사할 때 쓸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생물다양성이나 문화다양성처럼 앞에 수식어를 붙여 어떠한 의지·지향을 담아 쓰는 경우가 많다. 이 말의 놀라운 사용법을 최근 접했다. 정영환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이 5·18민주화운동 북한 개입설 등을 주장한 도태우 변호사 공천 결정을 유지하며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정당이지 않으냐”고 해명했다. 도 변호사의 5·18 폄훼 발언은 소수에 속한다. 그것이 소수인 이유는 이미 사실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허위에 기반한 의견으로 5·18 희생자와 유족에게 한번 더 상처를 주는 말도 다양성으로 감싸줘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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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사라지는 한반도평화교섭본부 윤석열 대통령은 ‘평화’라는 말을 쓰는 데 인색하다. 3·1절 기념사에서는 네 번 썼다. 주로 ‘세계 평화와 번영’을 말할 때였다. 반대로, 한반도와 관련해서는 평화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그것을 써야 할 때는 ‘힘에 의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러지 않으면 유약하다는 인상을 준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런 점에서 현 정부 들어 곳곳에서 평화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이 이해된다. 국가보훈처(현 국가보훈부)는 2022년 9월 ‘평화실’이라는 회의실 명칭을 6·25 당시 미8군사령관 이름을 따서 ‘밴플리트홀’로 바꿨다. 강원평화교육원은 지난해 4월 강원도교육청 통일교육원으로 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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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윤석열식 ‘민생 사용법’ 요즘 윤석열 대통령 입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 ‘민생’이다. 그는 22일 경남 창원시에서 지역 기업인들을 만나 “원전이 곧 민생”이라고 말했다. 올 들어 자그마치 14번째 이어온 ‘민생토론회’ 자리였다. 지난 18일에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민생 현안 집중 등 제반 사유로 인해” 방문을 연기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국민들은 초유의 나흘 앞 국빈 정상방문 취소 사유가,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이 아니라 ‘민생’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듣게 됐다. 말의 사용 빈도로만 보면 가히 ‘민생 대통령’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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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평화학자’ 요한 갈퉁의 죽음 윤석열 대통령은, 평화라는 말을 자주 쓴다. 나름의 평화관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평화론자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그의 평화 앞에는 ‘힘에 의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상대의 위협에 굴복해 주어지는 평화는 가짜 평화’라고 한다. 문제는 그런 평화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같은 이들도 추구한다는 데 있다. 내가 강한 무기를 갖추면, 상대는 더 강한 무기로 응수함으로써 ‘안보 딜레마’라고 부르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그런 평화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많은 자원을 전쟁 대비에 써야 하고, 그렇게 해도 공멸에 대한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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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이민청은 필요…이번 설립안은 껍데기만 있고 내용은 없다” 결혼할 남성에 비해 여성이 적고, 작업장에서 일할 노동자가 더 필요하고, 학교에 들어갈 학생이 줄어든다면? 그 사회 구성원들은 어디선가 새로운 사람들이 와주었으면 하고 생각하게 된다. 동시에 사람들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집을 떠나는 모험을 감행할 용의가 있다. 이렇게 이주의 수요와 공급이 생겨난다. 이주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국가는 그들의 이동을 관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 사회에 적응하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것들이 이민 정책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전통적 이민 수용 국가가 아닌 한국은 체계적인 이민 정책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