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윤석열식 ‘민생 사용법’

손제민 논설위원

요즘 윤석열 대통령 입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 ‘민생’이다. 그는 22일 경남 창원시에서 지역 기업인들을 만나 “원전이 곧 민생”이라고 말했다. 올 들어 자그마치 14번째 이어온 ‘민생토론회’ 자리였다. 지난 18일에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메테 프레데릭센 덴마크 총리와 전화 통화를 갖고 “민생 현안 집중 등 제반 사유로 인해” 방문을 연기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국민들은 초유의 나흘 앞 국빈 정상방문 취소 사유가, 김건희 여사 명품백 수수 논란이 아니라 ‘민생’ 때문이었음을 비로소 듣게 됐다. 말의 사용 빈도로만 보면 가히 ‘민생 대통령’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해외 순방이 너무 잦다는 지적이 이어지자 지난해 12월26일 국무회의에서 “순방이 곧 일자리 창출이자 민생”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뭐지? 한국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불과 두 달 전에는 순방이 곧 민생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민생을 위해 순방을 가지 않는다 했다.

윤 대통령에게 도대체 그 민생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말일까. 누군가가 어떤 말을 아무 곳에나 너무 자주 써서 그 의미가 불분명해지다 못해 상충되는 지경에 이른다면, 사회적 약속인 언어로서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민생의 사전적 정의인 ‘일반 국민의 생활과 생계’에 그대로 집중해서는 발화자 의도를 파악하는 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땐 맥락을 파악해야 하는데, 그와 가까운 이들이 그 말을 어떻게 쓰는지 보는 게 도움이 된다. 윤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김 여사 명품백 수수 문제로 갈등을 겪은 뒤인 지난달 29일 오찬 회동을 했을 때 동석한 윤재옥 국민의힘 원내대표의 말이다. “오늘은 민생 문제만 얘기했다.” ‘윤·한 갈등’이 격했던 때라 그 말을 그대로 믿는 이는 찾기 어려웠다. 명품백 물음에 민생 얘기로 빠져나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윤 대통령이 민생이란 말을 쓸 때는 ‘명품백은 생각하지 마’라는 의미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민생만큼 그 쓰임이 구체적이지 않아 공허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쓰이는 말도 없는 것 같다. 이런 식이면, 정치권도 언론도 이 말 사용을 자제하는 게 좋겠다.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경남 창원시 경남도청에서 원전 산업을 주제로 ‘민생 토론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2일 경남 창원시 경남도청에서 원전 산업을 주제로 ‘민생 토론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Today`s HOT
올림픽 성화 도착에 환호하는 군중들 러시아 전승절 열병식 이스라엘공관 앞 친팔시위 축하하는 북마케도니아 우파 야당 지지자들
파리 올림픽 보라색 트랙 첫 선! 영양실조에 걸리는 아이티 아이들
폭격 맞은 라파 골란고원에서 훈련하는 이스라엘 예비군들
바다사자가 점령한 샌프란만 브라질 홍수, 대피하는 주민들 토네이도로 파손된 페덱스 시설 디엔비엔푸 전투 70주년 기념식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