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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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아직도 자주국방을 말해야 하는 나라 미국·이란 전쟁은 시선을 한반도로 옮겨놓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국가는 스스로 지켜야지 왜 의존하냐”고 했다. 한국의 방위 능력이 충분하다며 전쟁에 대한 국민적 불안감을 다독이고, 자주국방의 필요성도 새삼 강조한 것이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은 2029년 3월을 전작권 전환 목표 시기로 처음 제시했다. 이재명 정부는 2028년까지 전작권을 돌려받으려 한다. 한국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미국에 넘겨준 작전통제권을 온전히 환수하지 못했다. 76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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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북한축구단의 방남 축구는 남북 체육교류 역사를 상징하는 종목이다.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인 1929년부터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두 도시를 오가며 벌였던 경평축구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가 민족정신 고취를 우려해 1942년 모든 구기 종목 경기를 중단시키며 명맥이 끊겼던 경평축구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부활했다. 그러나 분단선이 굳어지면서 남북교류가 끊겼고 경평축구도 더는 열리지 못했다. -
여적 어느 이태원 상인의 죽음 2022년 10월29일 당시 33세 A씨는 이태원 해밀톤호텔 부근에서 주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태원은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와 방역 지침이 완화된 이후 처음 맞는 핼러윈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순식간이었다. 인파에 밀린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A씨는 가게를 뛰쳐나와 쓰러진 사람들을 옮겼다. 159명이 목숨을 잃은 참사 이후 이태원 상권에 인적이 끊기자 A씨는 1년 뒤 주점을 닫고 다른 가게에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무엇보다 그날의 충격과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 A씨는 지난 19일 집을 나간 뒤 연락이 끊어졌고 29일 숨진 채 발견됐다. -
여적 미국의 ‘차가운 내전’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산층의 나라’였다. 대다수 시민이 임금으로, 퇴직 후 연금으로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중산층 비율은 60%가 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세계화가 본격화하면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빈부격차가 심각한 나라가 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비백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는 백인 보수층의 박탈감과 분노를 자극해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됐다. -
여적 두 해협 이야기 홍해는 북아프리카 동쪽과 아라비아반도 서쪽 사이에 있다. 홍해는 남단에 있는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오른쪽으로 꺾여 아덴만과 만난다. 실크로드가 유럽과 아시아를 육상으로 연결했다면, 홍해는 해상으로 잇는다. 이집트 북부의 육지 200㎞를 뚫어 지중해로 통하는 수에즈 운하가 1869년 개통되면서다. 유럽 대륙에서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빙 돌아 아시아로 가던 거리가 9000㎞ 줄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세계 해상 무역량의 10%, 컨테이너 물동량의 30%가 지나는 관문이 됐다. 아라비아반도 동쪽에는 페르시아만이 있다.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오만만으로 흐른 뒤 인도양으로 간다. 세계 원유 운송량의 25%를 차지한다. -
여적 남북관계, 한조관계 1991년 9월17일(현지 시간)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했다. 알파벳 순서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과 대한민국(ROK)은 160·161번째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12월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로 시작하는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됐다. 유엔 동시 가입은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하는 현실을 반영한 국가 간 보편적 관계를, 남북기본합의서는 동족 간 통일지향적 특수관계를 의미했다. 남북 간 관계는 이중적이다. -
논설위원의 단도직입 “내일 끝나도 문제 없는 전쟁…미·이란 모두 ‘발빼기 명분’ 찾는 중” 한국외국어대 이란어과를 졸업하고 석사를 받은 뒤 1998년 테헤란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이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첫 외국인이었다. 2019년 9월부터 1년간 이란 알라메 타바타바이대 정치학과에서 교환 교수를 했다. 한국중동학회장을 지냈으며 아시아문화박물관 운영위원과 법무부·해양경찰청 등에서 자문위원을 맡았다. <중동은 불타고 있다>(2011), <시아파의 부활과 중동정치의 지각변동>(2018), <이란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2020) 등을 썼고, <예루살렘 전기> 등을 번역했다. -
여적 하르그섬 하르그섬(Kharg Island)은 이란 본토에서 25㎞ 떨어진 페르시아만 북쪽에 있다. 면적 20㎢로 울릉도(72.6㎢)의 3분의 1도 안 되는 섬이다. 이곳에선 기원전 아케메네스 시대 설형문자(쐐기문자) 비문이 발견됐고, 7세기 기독교 수도원 유적도 있다. 고대에는 교역선이 쉬어가던 기항지였고 유럽의 식민지 확장 시절엔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무역 거점이었다. -
여적 ‘하메네이 2세’ 체제 이란의 무함마드 리자 팔레비 왕이 1979년 1월16일 이집트로 도피했다. 그의 세속주의·친미주의에 반발한 시민 봉기로 54년간 2대에 걸친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것이다. 이슬람 혁명에 성공한 이란은 왕조에서 공화국으로, 나아가 샤리아(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신정(神政)체제가 됐다. 망명지 프랑스에서 돌아온 이슬람 시아파 성직자 루홀라 호메이니는 ‘초대’ 최고지도자(라흐바르)가 됐다. 군 최고 통수권자이자 입법·사법·행정을 아우른 국정의 최종 결정자였다. -
여적 쿠르드족의 비애 쿠르드족은 중동의 타우루스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이 교차하는 쿠르디스탄(쿠르드족의 땅)에서 살았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양·염소를 치는 유목 생활을 했다. 3000만명이 넘는 쿠르드족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 없는 민족’이다. 쿠르드족이 독립 국가가 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 연합국은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과의 세브르 조약에 쿠르드 국가 건설을 포함시켰다. 쿠르드족이 오스만 제국 공격에 참여한 이유였다. 그러나 3년 뒤 로잔 조약에선 빠졌다. 쿠르드족은 튀르키예·이라크·이란·시리아 등 네 나라로 흩어져 그 나라의 소수민족으로 살며 차별을 겪었다. 튀르키예는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했다. 수니파인 쿠르드족은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에서 박해를 당했다. 독립 시도는 번번이 무산됐다. -
여적 친미 정권 만들기 냉전 시기 미국이 사용한 외교정책 수단 중 하나는 정권교체였다. 민주주의 체제·질서 수호자를 자처하며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권을 전복시키고 친미 정권을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에는 중앙정보국(CIA)의 비밀공작이 있었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대통령이 1950년 취임해 대대적인 토지개혁 작업에 나섰다. 그러자 미국의 프루트 컴퍼니 사업이 타격을 받게 됐다. 이 회사는 바나나 자본을 바탕으로 주요 경작지를 장악하고 철도·항만 등에서도 큰 돈을 벌고 있었다. 미국은 군 장교인 아르마스를 내세워 반군 세력을 지원, 1954년 아르벤스를 쫓아냈다. 다음 타깃은 칠레였다. 1970년 집권한 ‘사회주의자’ 아옌데 대통령이 주요 산업 국유화를 추진하자, 칠레에 대규모 자금을 투자했던 미국은 정권 붕괴 작업에 들어갔다. 1973년 CIA가 지원한 피노체트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 정권을 전복시켰다. 냉전 시대 이후인 2003년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겠다며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고, 2011년 리비아의 카다피 체제를 무너뜨렸다. -
여적 통일부 장관의 대북 사과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지난 10일 민간인이 북한으로 무인기를 보낸 데 대해 “북측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사건은 현재 군경이 합동조사 중인데, 정 장관은 조사가 마무리 국면이라고 판단해 입장을 밝힌 것으로 보인다. 정부 차원에서 나온 첫 공식 사과였다. 분단 후 남북 간에 사과할 일은 대부분 북한이 원인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대체로 사과에 인색했고, 조선중앙통신 등 대외 매체를 통해 간접 사과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2020년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사건 발생 사흘 뒤인 9월25일 통일전선부가 청와대에 보낸 통지문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 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더해줘 대단히 미안하다”는 뜻을 전했다. 남한 당국에 직접 공개 사과한 최고지도자는 김정은이 처음이었다. 정 장관은 이 사건과 2015년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사건을 거론하며 민간인 무인기 침투 사건도 공식적으로 유감을 밝힐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