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홍욱
논설위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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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언론 봉쇄한다고 명품백이 작은 파우치 되나 12·3 내란의 밤, 윤석열이 경찰을 투입해 언론사를 봉쇄하고 소방청을 통해 단전·단수하라고 이상민(당시 행정안전부 장관)에 지시했다. 대상은 경향신문·한겨레·MBC·JTBC 등 언론사 4곳과 여론조사 꽃, 결행 시간은 ‘자정’이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이런 조치를 문건으로 전달받은 이상민은 포고령 발령 직후 경찰청장과 소방청장에 전화했고, 소방청장은 소방청 차장에게, 차장은 서울소방재난본부장에게 지시를 하달했다. 검찰의 윤석열 공소장에 적시된 내용이다. 비상계엄 소식에 여의도로 달려간 시민들, 신속하게 계엄을 해제한 야당 의원들이 아니었다면 윤석열은 국회를 장악한 뒤 비판 언론들을 마비시켰을 것이다. 이를 본보기 삼아 다른 언론사를 겁박했을 것이다. 무장 계엄군이 국회 본청을 헤집고 다니던 모습과 함께 한동안 박제될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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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LA 산불 재앙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동시다발한 산불이 닷새째 확산하고 있다. 지난 7일(현지시간) 남부 해안의 퍼시픽 팰리세이즈에서 발생한 ‘팰리세이즈 산불’을 시작으로 ‘이튼 산불’ ‘허스트 산불’ ‘케네스 산불’ 등 4건의 산불이 진행 중이다. 11일 현재 산불 피해 면적은 156㎢로, 서울시 면적(605㎢)의 4분의 1을 넘는다. 최소 11명이 사망하고, 13명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된다. LA 당국은 수천명의 소방인력을 투입해 총력전을 벌이고 있지만 산불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피해 면적이 큰 팰리세이즈 산불과 이튼 산불은 진압률이 10%대에 머물고 있고, 바람이 수그러들었다가 거세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겨울 가뭄으로 불을 끌 물조차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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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한덕수의 처세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관운(官運)의 대명사로 불린다. 1970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한 그는 김영삼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까지 진보·보수를 넘나들며 6개 정부에 걸쳐 고위 공직을 맡았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만 노무현 정부에 이어 두번째다. 모두 합쳐 3년5개월째인 총리 재임 기간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가장 길다. 그러다 윤석열이 위헌적 계엄 사태로 국회에서 탄핵소추되며 고건·황교안에 이어 역대 3번째 대통령 권한대행직까지 맡게 됐다. 한 대행은 윤석열 국정의 오만·독선·퇴행을 바로잡지 않았고, 이태원 참사 등 국가적 재난이 발생해도 책임지지 않았다. 진퇴가 굵은 국무총리 상과 처신이 아니었다. 그는 여당이 4·10 총선에서 참패한 직후에야 윤석열에게 사의를 표명했지만, 지난 8월 재신임을 받은 후 “(윤석열은) 대인이시다. 제일 개혁적 대통령”이라는 낯 뜨거운 발언을 했다. 윤석열 임기 5년을 같이하는 ‘오(五)덕수’가 될 거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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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국민의힘은 왜 이럴까 대통령 윤석열이 틈만 나면 ‘반국가세력’을 외쳐댔지만 계엄이 현실화할 줄은 몰랐다. 12·3 비상계엄은 윤석열의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몇달 전부터 준비됐다는 사실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회가 계엄을 2시간 만에 해제하지 못했다면 시민들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을지,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2시간짜리 내란이 어디 있냐”거나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식의 윤석열의 담화는 망상에 사로잡힌 미치광이의 말이라고 치부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헌정 중단을 불러올 수 있던 내란을 막지 않고 윤석열 탄핵 후에도 방어에 급급한 국민의힘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국민의힘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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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한동훈의 ‘5개월 정치’ 국민의힘 대표 한동훈은 대통령 윤석열과의 관계 속에서 주목받아왔다. 검찰에선 윤석열의 오른팔이었고, 윤석열 정부에선 초대 법무장관에 발탁된 ‘황태자’였다. 정치 데뷔도 지난해 12월 총선을 앞두고 여당 비대위원장으로 화려하게 시작했다. 윤 대통령은 기회가 될 때마다 한 대표를 ‘꽃마차’에 태워줬다. 하지만 한 대표가 김건희 여사 문제를 지적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틀어졌다. 한동훈이 7·23 전당대회에서 압승한 배경에는 윤석열이 있었다. 친윤이 한동훈을 ‘배신자’라고 공격했지만, 윤석열 부부에 실망한 당원과 변화를 바라는 지지층은 그를 원했다. 미래권력의 완승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대표이자 차기 대선주자로서 윤석열과의 완전한 차별화를 해내지 못했고, 민심에도 순응하지 않았다. 주요 국면마다 결기·소신·정치력 부족을 드러냈고, 소통과 설득 능력에 의문을 갖는 이들도 적지 않다.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한 약속 불이행은 그렇게 오락가락한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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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소신 투표’ 안철수·김예지·김상욱 국회의원은 저마다 독립된 헌법기관이다. 헌법 제46조 2항이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한 대로 국민 대표자로서 의사결정을 해야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만은 않다. 정치 결사체인 정당은 번번이, 특히 중요한 표결을 앞두고 당론을 정해 따를 것을 요구한다. 의원이 당론을 거스르고 소신을 지키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당 지도부 눈 밖에 나고, 차기 공천에서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지난 7일 국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195명이 참여했다. 재적 의원 300명의 3분의 2를 넘지 못한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탄핵안은 투표함을 열어보지도 못한 채 자동폐기됐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당론으로 윤석열의 탄핵안 표결에 집단 불참했고, 안철수·김예지·김상욱 의원 3명만이 표결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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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한동훈, 간 보다 흘러간 11개월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7일 기자회견은 ‘어찌 됐든 사과’만 남았다. 윤 대통령은 남은 임기를 ‘정신 차리고 잘해보려는구나’라는 일말의 기대조차 주지 않았다. 실패를 향한 폭주 선언이었다. 친한동훈계 인사들의 입에선 “망했다” “안 하니만 못했다”는 탄식이 나왔다. 윤 대통령에게 “담화는 반드시 국민 눈높이에 맞아야 한다”고 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오전 당대표실을 나간 뒤 종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한 대표도 당혹스럽고 실망했을 거라고 봤던 날이다. 윤 대통령이 2시간20분 동안 쏟아낸 4만4000여자 공식 속기록 어디에도 한 대표 요구가 제대로 반영됐다는 표현은 없었다. 오독 불가였다. 윤 대통령은 또다시 한 대표를 패싱했고, 수모를 줬다. 그런데 한 대표는 이튿날 낸 입장문에서 “대통령께서 현 상황에 대해 사과하고 인적 쇄신, 김건희 여사 활동 중단, 조건 없는 특별감찰관 임명을 국민들께 약속했다”고 했다. 나아가 무슨 쇄신 의지가 있었다는 건지 “실천을 위해 당은 민심을 더 따르겠다”고 했다. 이런 반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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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대통령의 골프 외교 미국 역대 대통령은 대부분 골프를 즐겼다. 그중에서도 우드로 윌슨,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등은 ‘백악관에 없으면 골프장에 있다’는 말이 나온 대통령이었다. 외국 정상을 만나는 자리에서도 골프가 빠지지 않았다. 상대국 정상에게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세계 최강국 대통령과의 긴 시간을 독점할 수 있는 기회였다. 2014년 1월 당시 존 키 뉴질랜드 총리는 하와이에서 오바마와 골프 회동을 했는데, 후일 “5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다. 골프 한 게임을 한 것이 양자회담을 10년 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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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전쟁인데 무슨 잔치?’ 2017년 10월5일 당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북 군사 행동 가능성을 시사하는 ‘폭풍 전의 고요’를 언급했다. 그해 초부터 예열된 한반도 전쟁 위기가 최고조로 치달았다. 사흘 뒤 뉴욕타임스에 소설가 한강의 기고문이 실렸다. 한강은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할 때, 한국은 몸서리친다’는 제목의 글에서 “갈수록 악화되는 말의 전쟁이 실제 전쟁이 될까 두렵다”고 했다. 그는 “누구도 한반도에서 또 다른 대리전이 일어나는 것을 절대 원치 않는다”며 “승리로 귀결되는 어떠한 전쟁 시나리오도 없다”고 했다.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메시지는 미국 내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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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윤석열·한동훈의 기싸움을 왜 봐야 하나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는 ‘폭탄주’와 ‘콜라’만큼 기질이나 스타일이 한참 다르다. 그래도 두 사람은 2003년 SK 분식회계 사건에서 만나 형님, 동생 하며 20년을 지냈다. 고락을 함께한 둘의 브로맨스가 얼마나 깊었던지 윤 대통령은 대선 당시 한 대표를 “수사를 독립운동처럼 해온 사람”이라고 했다. 한 대표는 법무장관으로 정권 2인자, 소통령으로 불렸다. 지금 보면 두 사람은 서로가 존경·존중하는 마음으로 끈끈한 관계를 이어온 게 아니라 상명하복의 검사동일체 틀에서 이해가 맞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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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김정은의 ‘통일 지우기’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7년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타고 육로 방북했다. 이 고속도로의 기점은 평양 남단에 위치한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으로, 김정일 때인 2001년 8월 세워졌다. 3대 헌장은 남북이 합의한 ‘조국통일 3대 원칙’과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이다. 기념탑 인근에는 “조국을 통일하려면, 각계각층 모든 동포들이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서 하나로 굳게 뭉쳐야 합니다”라는 김일성의 생전 발언이 새겨진 조국통일명제비가 있었다. 김일성·김정일 유훈이 담긴 이 기념탑과 명제비는 지금 북한에 가면 볼 수 없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이 기념탑을 “꼴불견”이라며 철거하라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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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정의구현사제단 50주년 ‘민주화운동의 산증인’ 김정남이 두 권으로 정리한 <이 사람을 보라>는 한국 민주화운동사를 기록한 인물 열전이다. 김수환 추기경을 시작으로 49명이 소개되고, 단체는 유일하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등장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당시 천주교 원주교구장인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된 후 결성됐다. 그해 9월26일 명동성당에서 “우리는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과 소명을 믿는다”로 시작하는 ‘제1시국선언’을 발표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행동하는 신앙의 양심’이 되려고 나선 사제단의 발걸음은 권위주의 시대 고비마다 ‘암흑 속의 횃불’이었다. 폭동이라고 거짓 선전되던 5·18민주화운동 실상을 앞장서 알렸다. 1987년 5월17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이 조작됐다’는 폭로는 6월항쟁의 도화선이었다. 사제단은 2007년 10월 삼성 비자금 의혹을 폭로하기 위해 찾아온 김용철 변호사를 맞이했다. 이 일은 경제민주화 문제를 환기시켰다. 사제단은 생명의 가치와 존엄이 짓밟히는 곳으로도 향했다. 2003년 새만금 갯벌을 살리기 위해 65일간 삼보일배를 했고, 용산 참사·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미사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