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송이
경향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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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어긋난 보통의 나날들 서울 오아시스 김채원 지음 |문학과지성사 |266쪽 |1만6000원 동우, 석용, 성아는 친구 유림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양철 광고판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그들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네 사람이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네다. 하지만 그들은 유림과의 기억을 떠올리거나 유림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그저 같이 걸을 뿐이다. 기억들이 선명히 떠오를 만한 장소들은 일부러 피하는 듯도 하다. “농구대가 눈앞에 나타나면, 농구대의 둥근 테에 매달린 과거의 기억들을 새롭지 않게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탈구된 팔다리. 체육 시간. 푸른 뜰. 철봉들. 작은 아코디언. 배앓이. 식곤증. 포도당 알약들. 그러나 세 사람은 거기까지 걷지 않았다.” 이들은 유림이 살았던 원룸에 유품들을 정리하기 위해 역으로 가다가 누군가 예약해 둔 택시를 발견한다. 그리곤 우발적으로 택시를 빼앗아 타고 얼굴도 모르는 예약자가 설정해둔 목적지까지 가기로 한다. “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순서 없이 구경하고 나서 본 것들을 전부 잊어버”리며 다가올 시간을 유예하듯 정처없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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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람 樂書一覽 내 혀에 사는 ‘설명충’어떻게 뿌리 뽑을까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몹시 설명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설명하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을 지경으로 커졌다. 길을 걷다 처음 보는 사람을 붙잡고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전봇대는 전선이나 통신선을 늘여 매기 위하여 세운 기둥입니다. 전봇대의 어원은 <전보>를 전하는 기둥이라는 뜻인데 알고 계셨나요?’” <설명충 박멸기>(이진하)는 소설가 이진하의 엽편소설을 모은 작품집이다. 표제작은 어느날 주인공에게 갑자기 설명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증상이 나타나면서 시작한다. 주인공은 설명 때문에 동네에서 손가락질을 받고 여자친구와도 헤어진다. 정신과를 찾아 상담을 하고 뇌 MRI 사진도 찍었지만 도통 원인은 알 수 없었고 설명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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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 더 파격적이고 불량해야”···환경·전쟁·노인 문제로 넓어진 동시의 세계 “동시가 지금보다 더 파격적이고 불량하며 예상하지 못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간다면 더 좋은 동시의 시대를 열 수 있을 것이다.” 15일 서울 종로구 대한출판문화회관에서 <올해의 좋은 동시 2024> 출간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동시 문학의 한 해 흐름을 점검하며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했다. 안도현 선정위원은 “지난 10~20년 사이 새로운 시인들의 등장과 발표 지면의 증가로 우리 동시 문학은 점차 다양성을 확보해 왔다”고 평가했다. 그는 10년 주기로 등장하는 강렬한 시인의 사례를 언급하며, 동시 문학에서도 이와 같은 전환점을 만들어낼 시인의 출현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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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신작이 온다···황석영·정세랑 등 믿고 보는 작가들 로 가득한 2025 한국문학 2025년, 한국 문학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불러온 문학적 열기를 이어가며 새로운 도약을 이룰 수 있을까. 새해를 맞아 정보라 작가의 소설 <너의 유토피아>가 세계 3대 SF 문학상 중 하나인 미국의 필립 K. 딕상 후보에 올랐다는 희소식이 전해지며 한국 문학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정보라 작가는 이전 작품 <저주토끼>로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올해에도 한강 작가를 비롯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한국 작가들의 신작이 연이어 출간될 예정이어서 기대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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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라 ‘너의 유토피아’, 미국 필립 K. 딕상 후보에 정보라 작가의 소설집 <너의 유토피아>가 한국 소설 최초로 미국 필립 K. 딕상 후보에 올랐다. 휴고상, 네뷸러상과 함께 세계 3대 SF문학상으로 꼽히는 필립 K. 딕상은 전년도 미국에서 페이퍼백으로 출간된 뛰어난 SF 작품에 매년 수여된다. 출판사 인플루엔셜의 문학 브랜드 래빗홀은 13일 보도자료를 통해 안톤 허의 번역으로 알곤퀸북스에서 출간된 <너의 유토피아> 영문판이 필립 K. 딕상 후보 여섯 편 가운데 하나로 올랐다고 밝혔다.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SF소설이 세계 3대 SF문학상 중 하나에 후보로 오른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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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자들의 꿈과 다짐···“투박한 진심으로, 포기하지 않고, 오래오래 쓸 것” 한 해의 시작과 함께 문학에도 새롭고 힘찬 물결이 일고 있다. 올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안수현 시인, 남의현 소설가, 송연정 문학평론가가 그 주인공이다. 독자들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은 이들은 각자의 작품으로 한국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지난 9일 세 명의 당선자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안수현 시인에게 시는 언제나 함께 하는 존재였다. “인지할 수 없는 순간부터 시를 읽었다”라는 그는 “한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동시도 많이 읽었고, 중고등학생 때에도 혼자 쓰기도 하고 동아리에서 함께 쓰면서 여러 방면으로 잘 쓰고 싶어서 노력했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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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평범했던 여성, 그의 세계를 뒤흔든 공책 한 권 금지된 일기장| 알바 데 세스페데스 지음 |김지우 옮김 |한길사 |1만8000원 “애초에 일기장을 산 것 자체가 실수였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 하지만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까.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기장을 산 건지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처음부터 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일기를 쓰려면 몰래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미켈레와 아이들에게 숨겨야 할 테니까. 나는 비밀을 만들기 싫다. 게다가 우리 집은 너무 비좁아서 비밀을 만들래야 만들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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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의 문장 휴대전화가 사람을 끌고 바쁘게 걷고 있다 시 ‘빈 거리’의 일부다. 시 속 사람들은 자신의 리듬으로 걷기보다는 휴대전화에 끌려가듯 움직인다. “스물세 살 같은 땀방울/ 열세 살 같은 새로 솟는 깃털/ 세 살 같은 반짝이는 이빨” 같은 생명력 넘치는 인간적인 요소들은 이제 첨단 기기가 점령한 도시에서 굳이 언급하기 “쑥스러운” 옛것으로 전락했다. 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마무리된다. “끝내 만날 일 없는 발자국들과 발자국들이/ 누더기 햇살 속을 어른거린다/ 휴대전화끼리 속이고 사랑한다/ 휴대전화끼리 축의금과 조의금을 주고받는다/ 병원으로 화장장으로 도깨비불들이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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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 시는 “지독한 의심”을 거쳐 나온다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 필리프 자코테 지음 |류재화 옮김 |난다 |176쪽| 1만5000원 “시는 이렇게 뭐라도 포착하려고, 몇 개의 단어를 가지고 온다. 이건 이야기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다. 시간을, 조금 더 긴 시간을 요하는 성찰도 아니다. 다만 여러 감각들의 동시 발생, 아니면 적어도 감각의 약간 혼란스러운 집중이다. 이에 대한 분석은 그 맛을 고갈시킬 뿐이다.” 20세기 프랑스시를 대표하는 시인 필리프 자코테(1925~2021)의 산문집 <부재하는 형상들이 있는 풍경>이 국내에 출간되었다. 자코테는 자연과의 관계를 주요 주제로 삼으며, 이를 통해 시적 사유를 심화시켜왔다. 그의 시는 국내에서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았지만, 이번에 출간된 산문집도 자연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성격의 시적 산문들로 구성돼 있다. 산문의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섬세하고 절제된 언어와 독특한 리듬으로 산문시로도 읽힐 만큼 시적 울림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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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일람 樂書一覽 점집서 뒤늦게 깨달은 점, 주술로 삶을 바꿀 순 없다 이사를 해도 괜찮을까? 내 인생은 언제쯤 잘 풀릴까? 이 책은 7명의 작가들이 사주, 신점, 타로 등을 본 경험을 진솔하게 풀어낸 에세이다.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순간들을 맞닥뜨린 이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해 점술을 찾았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해답은 결국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보람 작가는 운영하던 책방의 이전 문제로 고민하던 중 생애 처음으로 신점을 보러 갔다. 점을 보던 중 갑작스럽게 던진 무당의 질문은 그를 놀라게 했다. “혹시, 최근 3년 사이에 가족상을 치르셨나요?” 1년 반 전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잘 지내신다”는 무당의 말이 설령 거짓일지라도 그는 그 말에서 위안을 얻었다. “이 말을 들으려고 내가 여기 온 것 같아. 엄마, 이제 아픈 몸에서 해방되어 잘 살고 있는 거지? 그거면 돼. 엄마가 잘 있으면 나는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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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 시 부문 심사평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고 질긴 생명의 온기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탄핵 소추안 가결을 하루 앞둔 날, 네 명의 심사위원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온종일 신춘문예 시 응모작을 읽고 있던 풍경이 문득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저물어가던 2024년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덮을 만한 사건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24년 이 땅에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현실이 문학을 압도해 버린 낯선 분위기 속에서 시 응모작들을 읽었다. 기후 위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강세였고,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자기 고백적으로 드러낸 시가 자주 눈에 띄었다. 고단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외롭고 무기력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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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의 상처 보듬는 한강의 언어 2024년 한강 작가(사진)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 최초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한국 문학사의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스웨덴 한림원의 평가처럼, 폭력과 그에 대항하는 인간 존재의 깊은 내면을 탐구해온 그의 수상은 문학의 본질적 의미와 그 힘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더해 한 작가의 수상은 ‘계엄’이라는 지극히 퇴행적인 한국 정치의 사건과 맞물리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구심점이자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