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벌 기업 2세들 경영권 암투...현실을 꼬집다

박송이 기자

서로 속이며 물고 뜯는 3남매

맹목적 야망과 비열한 계략 난무

곪아 있는 ‘그들만의 제국’ 생생

‘공공성보다 핏줄’ 기업들 풍자

한국 사회 어두운 면 들춰온 작가

“기술과 문명 성숙해진다고 해서

인간의 인간 착취 사라지지 않아”

‘제국의 사생활’의 주원규 작가. 네오픽션

‘제국의 사생활’의 주원규 작가. 네오픽션

제국의 사생활

주원규 지음|네오픽션|208쪽|16800원

거대한 테이블이 놓인 대기업의 한 회의실. 기업 규모 20위권인 삼호그룹의 창업주이자 회장인 장대혁이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 장대혁은 구두 수선공에서 시작해 ‘삼호제화’라는 기업을 세우고 금융, 건설, 엔터테인먼트로까지 사업을 확장해 그룹을 일군 재계의 전설적인 인물. 테이블 위에 올라선 그는 임원진들 앞에서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더니 옷을 벗어 던진다. 자신이 건설한 제국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제왕적 권력을 누렸지만, 그도 치매는 피할 수 없었다. 어머니가 모두 다른 장대혁의 세 자녀 장명진, 장명은, 장명우는 각자의 방식으로 기업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를 벌이기 시작한다.

<열외인종 잔혹사> <반인간선언> 등 그간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면을 조명해온 주원규 작가가 신작 <제국의 사생활>을 펴냈다. 이번 작품에서는 지극히 사적인 방식으로 오직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기업경영권’을 쟁탈하려는 권력층의 모습을 그렸다.

소설은 장대혁이 병원에 실려가고 긴급 이사회가 열리기까지 일주일 동안, 삼남매와 주변인물들이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속이며 물고 뜯는 과정을 숨가쁘게 보여준다. 등장인물은 장대혁의 직계 가족과 측근 정도로 단출하다. 복잡하고 어려운 경제·경영 이야기도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는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등장인물들의 맹목적 야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비열한 계략이 주를 이룬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일을 하고 있고, 소비자·시민사회 등 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망 안에 놓여 있는 기업의 이야기를 작가는 등장인물들의 뒤틀린 욕망만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단순한 구도로 그려낸다. 이는 경영권 승계가 ‘그들만의 리그’로 사유화되고 있는 현실을 좀더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로 읽힌다. 주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한국 사회에서 기업집단이 가진 가치가 여전히 몇몇 결정권자에 의해 좌우되는, 마치 농락과 같은 현실을 역설적으로 풍자한 한 폭의 크로키 같은 소설”이라고 설명한다. “소설의 제목에서 ‘제국’은 창업주들이 기업을 국민과 사회의 공공 자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본다는 점을 상징하고, ‘사생활’은 권력을 사유화한 이들의 행태가 최소한의 공공성을 잃어버린 채 사적 이익을 위해 남발하는 점을 꼬집고자 하는 의미가 담겼다.”

소설은 이같은 현실을 오락적으로 그려낸다. 서로의 바닥과 속셈을 잘 아는 등장인물들의 핑퐁 같은 대화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허술한 대기업의 실상을 설정한 부분은 실소를 자아낸다.

소설을 이끄는 주요 등장인물은 장대혁의 세 자녀다. 경제학 교수인 장남 장명진, 삼호그룹 기획본부장 차녀 장명은, 삼호엔터테인먼트 대표인 막내 장명우다. 여기에 장대혁의 네 번째 부인 오성은, 장명은의 전남편 김예훈, 최대주주 박삼도 IK저축은행 회장 등이 가세하면서 기업경영권을 둘러싼 이합집산은 점입가경이 된다.

삼남매는 단지 재벌2세라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경영승계의 자격을 얻지만, 욕망의 크기와는 달리 경력도 일천하고 능력도 부족하다. 장명진은 일찌감치 아버지와 거리를 두고 학자의 길을 택했고, 장명우는 허구한날 사고를 치는 집안의 골칫거리다. 세 인물 간의 구도로만 보면 언뜻 아버지 곁에서 기획본부장으로 일했던 장명은에게 경영권 승계라는 정당성이 있어보이지만, 그 정당성도 족벌 기업이 당연시되는 한국사회이기에 생긴다. 장명은은 “경영의 ‘경’자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기업을 꾸려온” 아버지를 비난하지만, ‘핏줄’이 아닌 전문경영인이 회사를 경영하는 일은 결코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오빠 장명진이 금감원에 기업내부의 비리에 대한 소스를 제공한 사실을 알고 “대한민국에서 원칙과 상식대로 기업하는 경우가 어디있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한편 말끝마다 욕을 달고 사는 장명우는 “사업이 무슨 확신으로 되나. 단지 감이고 운이지… 지금은 내가 우주의 기세가 가장 센 거고 운도 따라왔어”라며 자신감만 앞세운다. 소설 속 장명우의 캐릭터나 장대혁의 여성편력 등은 그간 영화나 드라마에서 재현됐던 전형적 재벌의 모습에 가깝다. 일견 클리셰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자본주의적 욕망을 극단으로 추구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여느 그렇고 그런” 이야기처럼 비슷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의 삶은 우울했다. 우울함의 기원은 여느 그렇고 그런 개발도상국 내지는 중진국 시절, 정경유착을 통해 성장을 경험한 이차산업의 역군들, 그 중에서도 남자 사장이란 인종이 벌이는 여성 편력으로부터 시작한다.”

셋 중 가장 욕망이 없고, 연구실에 전기가 끊긴 것도 모를 정도로 무기력해 보였던 장명진은 뒤늦게 “더 일찍 본성에 눈뜨지 못한 스스로를 향한 아쉬움”을 삼키며 난타전에 뛰어든다. 소설에는 소액주주 운동, 주식 환원 등 기업의 잘못된 운영을 바로잡기 위한 조치들도 잠깐 등장하지만, 이것들은 그 본래의 목적이 아니라 권력쟁탈을 위한 장명진의 언론플레이 수단으로 쓰였다.

주원규 장편소설  ‘제국의 사생활’. 네오픽션

주원규 장편소설 ‘제국의 사생활’. 네오픽션

소설은 전문경영인이 등장하면서 예상치 못한 결말을 향해 간다. 그는 언론에서 족벌경영을 바로잡고 공적 정의를 실현하는 인물로 포장되지만, 실상은 삼남매의 뒤틀린 욕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인물이다. “이 나라 고위층 중에 이해충돌에 안 걸리는 놈이 어디 있는 줄 알아? 한 다리 건너면 다 같은 학교, 같은 가문, 같은 돈구멍 공유하고 있는데…”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한 등장인물의 말은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편법 승계, 혈연 중심의 철옹성 같은 지배 구조, 무능해도 책임지고 물러날 일 없는 세습권력, 소유권과 지배권의 괴리, 재벌 3세의 비행 등 한국 재벌의 문제점은 국내는 물론 해외 언론에서도 오랫 동안 지적돼 왔다. 주 작가는 오늘날 4차 산업혁명, AI 기술개발 등이 거론되며 마치 기업이 혁신의 주체인 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여전히 그 안은 그들만의 제국으로 곪아 있다고 지적한다. “기술이 첨단을 추구한다 해서, 흔히 말하는 문명이 성숙해진다 해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현상이 사라지진 않는다…그 지독한 현상이 혁신적이고 선도적인 기술 문명을 제법 빠르게 받아들이고 있는 대한민국 기업들에 뿌리박혀 고질적 흉터로 남아 있다. 기업을 자신의 사적 소유물로 생각하고 무법에 가까운 가족경영을 행하는 이들은 혁신, 공정, 문명 발전 등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기들을 ‘제국’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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