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시티보다 지역정당이 우선이다

서의동 논설실장

일본 지배하의 한국 경제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포장하는 논의는 사회 인프라를 깔고 공장을 세우는 정도로는 경제의 내생적 발전이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다. 자본과 기술이 일본에서 오고 기업 상층부나 고급 기술이 필요한 자리는 일본인이 독차지하는 구조에서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미숙련 노동에 종사하거나 영세 하청업체를 꾸리는 게 고작이었다. 조선인들의 정치적 의사결정권은 물론 없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유감스럽게도 ‘소멸’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 비수도권의 현실과 닮은 데가 많다.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수도권 쏠림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 영역에서 불균등 발전이 수십년간 누적돼온 탓이다. 2010년대 산업구조 재편으로 이런 흐름이 가속화됐다. 수출 비중이 높은 내구소비재나 자본재 생산공장들이 고임금·정규직 일자리와 협력업체들의 생태계를 만들어내는 고전적인 지방 산업구조는 무너졌다. 역대 정부는 입으론 균형발전을 외치면서 기업규제를 풀어 알짜 산업을 수도권에 몰아넣었다. ‘지방시대’를 열겠다는 윤석열 정부도 ‘세계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를 수도권에 짓겠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여당이 총선을 앞두고 서울을 더 키우자는 특별법을 만들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경박한 포퓰리즘이다.

그람시의 언어를 빌리면 한국 비수도권 주민들은 ‘서발턴(subaltern)’에 가깝다. 서발턴은 주류에서 배제돼 잉여적 위치에 있는 하위주체로, 그람시가 이탈리아 남부의 농민들을 분석하기 위한 개념이다. 20세기 전반의 이탈리아는 자본주의적 공업화가 이뤄진 북부와 반봉건적 농업구조가 온존하던 남부 간의 격차가 커지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북부(수도권)가 전 분야의 헤게모니를 쥔 반면 남부(비수도권) 주민들은 자결(自決)권이 없고, 목소리도 제대로 대변되지 않는다. 지역정치가 수도권 중심의 중앙정치에 예속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자치단체장의 재정자율성이 다소 커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중앙정부의 하청적 지위에 머물러 있다. 자치단체장과 지방의원들은 공천권을 쥔 중앙정치의 자장(磁場)에 갇혀있다.

서울에 기반한 거대 양당이 지방의 이해와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선거의 승패가 수도권에서 갈리기 때문이다. 12대(1985년) 총선 당시 지역구 의석 중 30% 미만이던 수도권 비중은 2020년 총선에선 절반 가까이(47.8%)로 늘어났다. 지방에서 ‘수도권 대항마’를 키우자는 메가시티론을 여당이 엉뚱하게 김포의 서울 편입론과 ‘메가 서울’ 논의에 끌고온 것이 수도권의 불리한 판세를 흔들려는 안간힘임을 모르는 이가 없다. 반면, 거대 양당의 ‘일당 독점체제’가 수십년째 견제 없이 지속되고 있는 영호남에서 정치는 고인물이 된 지 오래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무려 501명의 지방의원·자치단체장이 무투표 당선됐다. 거대 양당 외에 다른 선택을 극도로 제한한 선거제도 탓이다.

지방의 위기는 현지 특성을 살린 내생적·자율적 발전전략을 논의하고, 실천에 옮기는 지방의 주체적 거버넌스(의사결정구조)가 세워지지 않는 한 해결되기 어렵다. 그 역할을 지역정당이 맡아야 한다. 다양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이 정치세력을 결성해 지방의회 의원, 자치단체장, 나아가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를 내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역정당의 선거 참여는 그 자체로 거대 양당을 견제하는 효과를 갖는다. 영남과 호남의 지역정당이 정당연합을 구성해 총선과 대선에 참여할 수도 있다. 우리 가까이에 정당이 있고, 내 생활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동네 정치인’이 있다면 정치의 효능감은 높아질 것이다. 한계가 뚜렷한 ‘87년 체제’의 출구가 될 수도 있다.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는 1962년 정당 난립을 막는다며 정당법을 만들어 지역정당을 금지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계 주요국 중 지역정당을 금지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외에 찾기 어렵다. 경남 진주의 ‘진주같이’ 등 현재 활동 중인 지역정당들은 간판 없이 무소속으로 출마할 수밖에 없다.

수도권에 대항할 거대도시를 만들자는 메가시티의 취지에 적극 공감한다. 그러나 메가시티가 ‘관제(官製) 구조물’이 아니라 주민들의 삶에 정확히 도움이 되도록 하려면 독자성을 가진 지역정치가 필요하다. 메가시티보다 더 급한 건 정당법을 고쳐 지역정당에 대한 규제를 푸는 것이다.

서의동 논설실장

서의동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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