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해내는 일들

이 나라에서 내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움으로 무얼 하는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를 가슴에 품은 채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헤엄출판사 대표

사랑하는 친구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미 수술실에 들어간 터라 친구 휴대폰의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전화기가 켜지기만을 기다리며 친구의 부드러운 밤색 피부를 떠올렸다. 뒷산을 성큼성큼 오르는 두 다리와 자주 엉키는 머리카락과 툭 치면 흘러나오는 숱한 문장들도 떠올렸다. 그는 아주 많은 책을 외우고 있었다. 친구의 사라짐은 도서관의 사라짐이고 어떤 대화의 멸종이고 다시는 만질 수 없는 살갗일 것이었다.

며칠 만에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몸 이곳저곳에 깁스와 철심과 붕대를 칭칭 감은, 그러나 또렷하게 살아있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부러지지 않은 한쪽 팔로 간신히 휴대폰을 든 채 나를 반겼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내 음성을 얼마나 귀하게 듣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통화, 지금 이 목소리를 영영 못 들을 수 있었던 거잖아. 하나도 당연하지 않은 거였어.” 먼 곳에 갔다가 돌아온 사람처럼 그가 말했다. 만남이란 게 그의 안에서 아주 절절한 무엇이 돼 있었다.

이내 친구는 마음 아픈 소식을 들려주었다. 다치기 직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다. 몇 겹의 험한 시절을 지나고 있음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의 성함을 물었다. “우리 아빠 이름은 희운이었어. 기쁠 희(喜)에 구름 운(雲)자를 썼어.”

희운은 언제나 저것 좀 보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창밖의 산수유를. 시간의 흐름을. 코앞에 놓인 어여쁜 것들을…. 희운 때문에 친구는 그토록 자기 아닌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사람으로 자랐다. 희운과의 이별을 생각하면 북이 찢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아프다고 친구는 말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모든 사람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된다고, 도대체 그들이 어떻게 견디는 건지, 무슨 힘으로 살아가는지 알고 싶다고 했다.

그리움을 꽃처럼 쥐고 산다는 것

유족들은 기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쉼 없이 그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우연히 좋은 식사를 함께 누렸던 어머니의 이야기다. “내 인생은 험하고 아프기도 했지만 내게도 한순간 축복이 왔어. 엄마랑 밥 한 끼 먹는 거. 그 흔한 게 얼마나 기적적인지 이제는 알아.”

죽음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밥 한 끼를 기적이라 말한다.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더 이상 볼 수 없어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시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덧붙인다. “이것은 참 흔하고 놀라운 끈기입니다. 그걸 꽃처럼 쥐고 살아갈게요.” 그리움과 고통, 환희와 슬픔을 꽃처럼 쥐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나는 배우고 있다.

사진 잡지 ‘스토크’ 39호의 화두는 ‘애도’다. 우리는 애도할 일이 많은 나라에 산다. 참사가 잦고 자살률이 높은 국가다. 이 책에서 정혜윤 PD는 대구 지하철 참사 유족들에 대해 이렇게 쓴다. 참사 이후 유족들은 냉소주의자나 은둔자나 복수하는 자 중에서 어떤 것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그들은 정말 어려운 정체성을 택했다고. 바로 ‘사랑하는 자’였다고…. 유족들이 자문했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들에겐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지 않나. 자신들의 우연한 비극은 그나마 더 나은 변화 속에서만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나.

조사 결과 참사의 규모를 키운 결정적 원인은 불에 몹시 잘 타는 지하철 내장재였다. 이후 유족들은 노조와 함께 대구 지하철 전 차량의 내장재를 불연재로 교체하는 일에 힘썼다. 이런 움직임은 다른 참사에서도 얼마든지 만나게 된다. 같은 책에서 김인정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유족들은 뒷이야기를 새로 쓰려고 한다. 같은 이름의 다음 고통을 막기 위해.”

남겨진 사람들이 쓰는 뒷이야기

우리는 상실한 이들이 일군 변화에 빚지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가 죽도록 애써서 겨우 조금 바꿔놓은 것이 한국 현대사의 한 흐름일 것이다. 지난해 10월29일 이후 여러 달이 지났다. 지난달 30일 국회에선 이태원 참사 특별법이 야당 주도로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 법안에 반대하는 여당 의원들은 표결에 불참했다고 한다.

지옥 같은 그리움을 꽃처럼 들고 살아가는 유족들의 이야기가 지금보다 더 귀하게 여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상실 이후에도 무엇이 가능한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결국 서로를 잃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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