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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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이준석 의원을 생각한다 지난 4일부터 시작된 ‘이준석 의원의 의원직 제명에 관한 청원’은 이틀 만에 14만4443명이 동의했고, 이 글을 쓰는 10일 오전 현재 청원인 수는 49만884명이다. 청원 성립 요건인 공개 이후 30일 이내 5만명 이상 동의를 훌쩍 넘었다. 실현 여부와 관련 없이 이 청원은 다른 국회의원들에게도 반면교사의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지난 6개월간 많은 일이 있었다. ‘객관적인 경중’을 따지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내게 절망감을 안겨준 사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국민의힘이 대선 후보를 교체하려던 시도와 그 발상이고, 또 하나는 3차 TV토론 때 폭력 발언으로 상징되는 ‘이준석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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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민주당,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1870~1924) 사후에 발간된 그의 전집 중 <여성의 해방>은 실제로는 반여성적 내용을 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레닌은 동료 혁명가 중 한 사람이었던 독일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클라라 체트킨(1857~1933)이 여성 당원들에게 성 문제(피임)를 주제로 토론을 조직했다며 그를 강하게 비판했다. “클라라, 당신이 저지른 잘못은 매우 심각한 것입니다. 내가(레닌) 들은 바로는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독서와 토론을 하도록 지정된 저녁 시간에 성과 결혼 문제를 우선으로 취급했다고 하더군요… 나는 내 귀를 의심하였소. 우리는 지금 역사상 최초로 무산계급 국가가 전 세계의 반혁명 세력을 상대로 투쟁 중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단결해야 할 이때에 결혼 문제를 두고 토론하느라 바쁘시군요.” 레닌의 입장에서 보면, 체트킨은 혁명 의식을 고양해야 할 시간에 사소한 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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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여성학이란 무엇인가, 계명대 여성학과의 경우 “여성학자”라는 지칭이 있다. 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여성’과 ‘학자’의 개념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두 표현 모두 논쟁적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자’는 우리의 앎, 지식, 학문에 대한 인식을 뒤흔든다. 여전히 여성학자를 여성주의 연구자(feminist scholar)가 아니라 생물학적 성별이 여성(female)인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래서 상당수 기관이나 대학들이 여성주의자를 뽑아야 할 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단지 여성이라는 조건만 맞으면 선발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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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내전과 공존 지난달 말 윤동주 시인 80주기를 맞아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의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새벽에 공항 가는 택시를 탔는데, 기사분이 느닷없이 된소리로 “쭝국 가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했더니,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우리나라 선관위 직원 대부분이 중국 사람”이라는 주장부터 특정 정치인들은 사라져야 한다며 열변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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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의학은 사회과학이다 윤석열 정부의 의료 정책은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으로 상징되는 ‘대란’ 이미지가 전부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다수 시민들은 이 문제의 근본 성격을 잘 모르고 있다. “의료는 사회 문제”라고 말하기 전에, 이미 사회가 ‘붕괴’된 것일까. 윤석열 정부의 정책으로 불과 1년 만에 의료 체계도 사회도 붕괴된 느낌이다. 의대 정원 논란은 이미 많은 이의 영혼과 몸을 파괴했지만, 이후 어떤 형태로 더 큰 후유증이 드러날지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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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보수의 사상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완전한 영혼>에 실린 중편 ‘얼음의 집’의 주인공은 고문 가해자다. 그것도 일본 제국주의가 배출한 최고 ‘전문가’다. ‘얼음의 집’은 고문자의 시선에서 권력과 인간의 몸, 고통에 대해 탐구한다. 문학평론가 정과리가 “독자의 몸을 진저리치게 만드는 악을 드높이는 문학의 곡예”라고 평한 바 있듯, 이 작품은 행간마다 사유의 밀림으로 가득 차 있는 단순한 걸작을 넘은 명작(銘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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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우리’ 자신에게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 교육에 헌신해서 국민을 자각하게 한 덕분에 가능했다.” 자기도취자들의 계보일까. 나는 윤석열 ‘대통령’이 12월3일 이후 한 말 중에서 “(내가) 국회를 봉쇄하지 않아서 계엄 해제가 가능했다”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다. 4·19도 계엄 해제도 자신들의 치적이라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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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기민과 탄핵 2016년부터 시작된 ‘촛불시위’에 연인원 1700만명이 참여했다. 이듬해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퇴진했다. ‘촛불’은 전국 각지에서 장기간 대규모로 이루어진 자발적 힘이었다. 당시 ‘여론 주도층’은 이 집회의 동력과 원인에 대해 많은 토론과 분석을 시도했다. 구한말 만민공동회가 역사적 기원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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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체념의 힘 의사이자 문화인류학자인 김관욱은 최근작 <몸, 살아내고 말하고 저항하는 몸들의 인류학>에서 인간의 몸이 발명해낸 질환으로 체념증후군(resignation syndrome)을 소개한다. 이 증상은 몸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극복하려 하기보다 고통을 감수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증상 중 하나가 수면인데, 무려 5년 동안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 깨어날까. 죽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아니, 수면이 유일한 자기 보호 조치라면 깨어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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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요즘 가부장제, 영화 ‘장손’ 지금 상영되고 있는 영화, 오정민 감독의 <장손>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1인 가구 시대, 장손(長孫)은 실재하는가. 모든 남성은 생계부양자인가. 가부장제는 누구에 의해 유지되는가. 쇠락하는 가부장제는 왜 여성의 지위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장손>은 전통적인 유교적 가부장제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고택, 계절의 풍광을 넘치도록 담아낸 화면, 매직 아워(빛이 충분하면서도 인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무렵) 촬영이 많은 영상미, 빈틈없는 시나리오, 연기와 연출 모든 면에서 많은 칭찬을 받은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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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위안부’ 운동은 일본의 역사 부정 속에서 피해자의 증언에 의존하여 진행되어온 사회운동이다. 피해자의 말하기와 듣기의 전 과정은 투명하지 않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간 피해자의 말을 각자가 필요한 방식으로 전유했다. 이 글의 제목은 평소 나의 생각이자 최근 출간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휴머니스트, 2024)의 편저자 김은실은 ‘위안부’에 대한 새로운 논의 방식을 제안한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을 확인하는 도구적인 말하기와 듣기가 아니라 새로운 앎의 형식을 만날 수 있는 개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듣기는 답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다른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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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의 낯선 사이 흑인 문학과 민족 문학 인종선(人種線) - 흑인 쫀슨에게 밖에선세차게 씽씽 눈발이 휘몰아치는 밤조고마한 온돌에 발을 녹이며두터운 입술에서굵다란 눈물방울 떨치는쫀슨 너의 이야기 쇠사슬 늘이어흑노(黑奴)의 아들로서 시장에 팔려온이제는 고이 쉬는 할아버지는시아고에 활발한 인종선에무지한 백인이 던지는 벽돌에집앞에서 쓰러졌으며이리하여원수를 갚겠다는 미친 아버지마저식칼에 찔리어길바닥에 자빠져버렸다원통함이여색(色) 있는 슬픔이여웃집에선 여인마저 까귀에 찍혔다탄환은 사정없이 가슴패기를 뚫으는구나하수도에 떠가는 검은 송장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