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지식인 모두가 기후위기를 심각하다고 부르짖지만, 뒤돌아서는 평소대로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소비한다. 로이 스크랜턴은 우리가 기후위기를 해결하고 문명과 인류를 이어갈 확률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혁신이 이어지고 경제가 성장해도 미래는 암울하다. 아니, 더 암울한데,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전 지구적 기후위기는 바로 이런 자본주의적 혁신과 성장에서 오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이 이산화탄소를 흡수해서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전망도 과장되어 있다. 우리는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삶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품위 있게 살아야 하는데, 그 길은 죽는 법을 배우는 데 있다. 애착이 가는 것, 사랑하는 존재, 확실한 미래, 자아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구원과 희망마저 포기해야 한다. 죽음 직전에 주변을 정리하듯, 우리는 지금 살아서 버려야 한다. 인류세 시대에 제대로 죽는 법을 배우는 게, 우리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대안도 희망도 없는 남은 시간
위 인용문은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안규남 옮김, 시프, 2023)라는 책에 과학철학자 홍성욱이 쓴 추천사이다. 나는 이 글을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했는데, 독후감이 다양했다. 젊은이들은 주로 기후위기에 관심이 많았고, 중년은 웰다잉 혹은 공수래공수거로 생각하는 듯했다.
죽음을 배우는 일은 자신과의 투쟁, 쉽지 않은 과정이다. 먼저 할 일은 자아를 버리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이다’ 같은 사고방식을 폐기해야 한다. ‘나’는 행위의 결과물일 뿐이다. 자의식은 자신을 상대화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그저 지구상의 수억만개 구성원 중 하나다. ‘자아’ 자체가 문명이 만들어낸 지식이지만, 그 자아와 초자아는 문명을 만들어낸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문명의 발전은 끝이 없다. 그 과정에서 인간들 사이의 삶의 격차와 지구 파괴는 필연적이다. 최근 몇년간 우리는 그 최정점을 겪고 있고 매일 갱신 중이다.
<인류세에서 죽음을 배우다>의 저자 로이 스크랜턴은 대안이 없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제대로 배우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내 생각에 죽음을 배우는 일이란, 소비를 비롯해 모든 영역에서 최소한으로 살며 동시에 서서히 소멸하는 삶인 것 같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다는 인식에 이르는 것이다.
희망을 찾는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면, 희망은 없다. 종말론이 아니라 지구는 종말하고 있다. 종말은 곳곳에서 산불로, 홍수로, 전염병으로, ‘자살 당함’으로 드러나고 있다. 더구나 이 책은 코로나19 발생 전인 2015년에 쓰였다. 저자가 코로나19를 경험했다면 책 내용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 책에 의하면, 지구의 온도 상승으로 그린란드에서 남극대륙까지 존재하는 빙하와 빙상이 녹으면 2040년에는 해수면이 2.4m 정도 상승하게 된다. 이미 진행 중인 서남극 대륙의 빙상 붕괴가 완전히 끝나면 해수면은 6m 올라간다. 지구 평균 온도가 1.5도 상승할 때 3억5000만명, 2도 올라가면 4억1000만명의 도시 인구가 물 부족 상태에 내몰린다.
이처럼 이 책에는 실감나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인 각종 통계들이 빼곡하다. 지구는 되돌릴 수 없는 위기에 처했다. 우리는 반복되는 ‘비상사태’, 즉 일상을 외면하는 극한의 소외된 삶을 살고 있다. 서울 변두리에 사는 지인은 수년째 여름만 되면 수해를 겪고 있다. 홍수가 아니라 지반이 무너지는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이번 여름에는 집 밖의 에어컨 실외기가 흙더미에 묻혔다. ‘순살 아파트’ 옆집이 무너지니 친구 집도 지반이 침하된 것이다. 공유지가 아니라고 관할 지자체는 보상해주지 않았다. 기후위기세(稅)를 개인이 내는 것이다.
이미 익숙하고 널리 알려진 단어, 인류세(Anthropocene)는 지구의 지질학적 역사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시기, 즉 지구 자체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환경 파괴 행위로 지질학에 영향을 미치는 시기를 뜻한다. 저자는 전 지구적 기후위기, 자본주의의 위기(실업),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는 모두 탄소를 연료로 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같은 원인의 다른 모습들이라고 본다.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자동차를 몰고 비행기를 타고 난방기와 에어컨을 사용하고 각종 기기를 충전하는 안락한 소비를 반복한다. 지속 불가능한 삶을 살면서 동시에 그 사실을 망각한다. 망각해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14년 9월,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서 벌어진 기후변화민중행진에 30만명의 사람들이 모였는데, 행사가 진행되었던 약 일주일 동안 이들이 스마트폰으로 e메일을 확인하고 트위터를 하고 사진을 찍는 글로벌 정보·소통 생태계에 접속하느라 사용한 전기량은 전 세계 전기 사용 총량의 약 10%라고 (추정)한다.
기후 관련법을 만들고 1회용품 안 쓰기, 분리수거, 재활용 등 일상의 실천들과 인식 변화를 위한 운동들도 문제 해결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 마치 제주도 해안가에 끊임없이 몰려드는 스티로폼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한국 사회는 발전주의 콤플렉스 때문에 사태와 상황 인식이 더욱 심각하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문제는 기후 변화가 너무 거대하고 사람들은 서로 다른 것을 원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바로 그 문제라는 것이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중단, 현재와 같은 우리 일상생활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이든 국가든 이에 합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강대국들은 기후 문제보다 자국의 국력, 인구 증가에 더 관심이 있다.
어떻게 살아갈 / 죽어갈 것인가
문명의 진보 자체가 문제인데, 이는 안보 딜레마의 원리와 같다. 안보 딜레마는 자국의 안전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행동이 주변국의 불안을 일으켜 다른 국가도 군사력 증가로 대응함으로써 군사력의 상호 경쟁으로 인한 인류 전체의 안보 불안을 말한다. 한 번 진보한 기술은 후퇴하지 않는다. 핵무기를 개발한 오펜하이머나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노벨처럼,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 기술을 발전시켰다. 핵무기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와 일본의 만행을 억제하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이후 모든 나라가 핵무기를 욕망하게 됐고 또 보유하게 됐다.
물리학자 박권에 의하면, 2023년 현재 핵무기의 개수는 대략 러시아 6000기, 미국 5000기, 중국 400기, 프랑스 290기, 영국 220기, 파키스탄 170기, 인도 160기, 이스라엘 90기, 북한 40기(추정)이다. 실상 북한의 개수를 보면,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북핵 문제’라는 말이 무색하다. 나의 이런 생각은 위험한 것일까. 핵 자체가 나쁜가, 강대국만 소유하는 것이 나쁜가.
홀로코스트 같은 비합리성을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인간 행동이나 기후위기를 과학 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문명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 기술은 또 다른 문제를 가져온다. 문제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공 지능 연구를 멈추자고 호소하는 과학자들도 많다.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도 말을 안 듣는다. 개인 간, 국가 간 불평등 때문이다. 지구가 동시 멸망하면 좋겠지만 피해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이 ‘피스 보트’를 타고 크루즈 여행이라는 ‘착한 소비’를 할 동안 아니 바로 그런 여행 때문에, 바다는 죽어가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유일한 해결은 자본주의의 중단이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므로 우리는 다른 삶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잘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사라 아메드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이제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 “행복은 무엇을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행복이라는 관념이 없다면, 통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행복은 염원이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 안전, 돈, 좋은 관계 … 인간은 이런 불가능한 희망을 평생 염원(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 사실을 각성하지 않으면 대안 없는 질문을 계속하게 된다. 행복을 희망에 대입시키면,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은 “희망이란 무엇인가, 희망이 있는가”가 아니다. “희망은 무엇을 하는가”이다. 희망이라는 관념이 지구를 방치하는 방식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희망 역시 바라는 마음이지 실현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희망이라는 언설이 부정의한 현실을 작동시킨다. 희망이 없다고 확실히 인식하면, 사람들은 일상에서 죽음 배우기 같은 다른 방식의 삶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죽는 방법이 곧 사는 방법이다.
<정희진 월간 오디오매거진 <정희진의 공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