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사용하는 “동료 시민 여러분”은 일견 의미가 있어 보인다. 여론도 대체로 우호적인데, 탈권위적이라는 의견이 많은 것 같다. 긍정적인 평가에 더해, 그가 말하는 시민의 범주에 사회적 약자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나는 한동훈 위원장의 이 표현에 두려움을 느낀다. 첫째 한 위원장이 시민을 동료라고 부르는 그 사고방식이 두렵고, 둘째 그의 말에 열광하는 팬덤이 두렵고, 셋째는 그가 탈권위적 인물 이미지를 가지게 될까봐 두렵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두려운 것은 세 번째 상황이다.
‘동료 시민인 국민들’은 한동훈 위원장에게 동료 의식을 느낄까. 아니, 한동훈 위원장 자신은 정말 스스로를 시민의 동료라고 생각할까. 그는 뭔가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비서진과 우산을 같이 쓰고 ‘폴더 인사’를 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 가장자리에 선다고 해서, 그가 국민의 동료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계급과 사회적 지위, 역할 측면에서 그는 ‘우리와 다르다’. 그는 안팎으로 책임져야 할 일이 많은, 집권당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자신을 공인으로서 시민의 대표자라고 생각한다면,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해야 맞다. 대권을 염두에 두고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이, 도대체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동료 시민’은 수평적 리더십도 아니고 겸손은 더욱 아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아직 자기 포지션이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온 정치 초년생의 말이다.
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에게 시민은 나와 다른 면도 있고 같은 면도 있는 타인이지 “시민 = 나의 동료”가 아니다. 게다가 대개 시민들은 한동훈 위원장의 ‘진짜 동료’인 ‘윤심 정치인’들보다 의식이 높다. 그와 동료이고 싶지 않은 시민들도 많다. 이래저래 시민들과 동료라는 발상은 난센스다. 전칭(全稱)은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했다. 역대 대통령 중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는 국민에 대한 외경심과 더불어 지도자로서 자기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동료 시민”은 탈권위가 아니다
한동훈 위원장의 “동료 시민”은 영어 “my fellow citizens(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의 직역이다. 맥락이 다른 영어 표현이 한국어와 결합하면서 ‘동료 시민’이라는 황망한 말이 나왔다. 중요한 점은 번역 문제가 아니고 한 위원장이 이 말을 사용한 배경, 그의 상황 인식이다. “동료 시민”을 외치는 한동훈 위원장과 이런 그에게 열광하는 일부 시민들의 모습은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의 결정적 장면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시민은 개인으로서 ‘평등’하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은 최소화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다.
그러나 지금 한국사회의 유권자가 원하는 리더는 배려심(?)을 가진 탈권위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보호해주고 평등한 정책을 펼쳐줄 유능하고 강인한 지도자다. 대통령은 국민을 대신해 자본과 ‘외세’와 싸워야 한다. 이것이 국민이 바라는 지도자의 책임이다. 정치 지도자가 국민과 ‘동료로서’ 관계를 맺고 책임을 반반으로 분담한다면, 국가와 대통령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지 않아도 지난 30년 동안 국민들은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일방적으로 고통 분담을 강요당해왔다.
빈부 양극화, 기후 위기, 검찰 개혁 등 진짜 문제는 제쳐두고, 특색 있는 정책도 없고 리더로서 절박한 역사적 사명감도 찾아보기 힘든 그의 “동료 시민 여러분”은 자신의 정치적 경력을 더욱 가볍게 만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치 신인이었고 국민은 그를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윤 대통령이 그간 한 일은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긴 것, 외국 방문과 거부권 행사가 잦다는 점, 지난 2년 동안 미국으로부터 18조원의 무기를 구입한 것(문재인 정권은 5년 동안 2조5000억원), 대일본·미국 관계에서 당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외에 성과와 업적도 있을 것이다. 큰 실망은 없다. 애초 별로 기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한동훈 위원장은 대통령 국정 수행 긍정 평가가 30% 안팎을 반복하는 상황에서, 변화를 향한 국민의 기대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윤 대통령은 정치권에 몸담은 지 불과 몇 개월 만에 대통령이 된 초유의 경우다. 이에 반해 한동훈 위원장은 윤 대통령 집권 내내 검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그러나 그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쉬운 길을 가려는 듯하다. 이를 탈권위주의로 인식하는 지지자들이 있으니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표적인 예가 총선 불출마이다. ‘험지’든 비례대표 끝 번호든 그는 지도자로서 승부를 봐야 한다. 이는 정치인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런 책임 회피, 리스크 회피가 “욕심 없음, 사심 없음”으로 환영받는 현상은, 그간 국민들이 얼마나 일부 정치인의 탐욕에 질려 있는지에 대한 반영일 뿐, 그 자신이 이러한 정서를 활용해서는 안 된다.
윤 대통령을 축구 국가대표팀의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에 비유하는 이들이 있다. 한동훈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클린스만 감독은 선수들의 개인기만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전술도 계획도 없다. 나는 축구에 문외한이지만, 한 나라의 대표팀 감독을 맡고 나서 그 나라에 상주하지 않고 전 세계를 외유하며 선수들의 ‘자율’을 강조하는 지도자는 탈권위적 리더가 아니라 그냥 무임승차자다.
한동훈 위원장의 총선 불출마는, 사형 선고를 받으며 4전5기로 대통령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지역주의 타파를 외치며 부산과 서울시 종로구 등을 ‘유랑’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비된다.
한 위원장이 4월 총선을 끝으로 국민의힘의 ‘비상 대책만 해결’하고, 정계를 은퇴한다면 전직 대통령과 비교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는 당연히 거쳐야 할 ‘정상적’ 절차를 건너뛰고 무책임을 탈권위로 포장하여 대권으로 직진하려는 것 같다.
리더는 신자유주의와 싸워야
윤석열 대통령이 안티 민주당의 산물이라면, 한동훈 위원장은 윤 대통령 부부와 대비를 통해 자기 이미지를 창출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동료 시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백’에 대한 이견으로 대통령의 기자회견 취소 사태까지 불러온 윤 대통령과의 갈등이, ‘아바타’로 귀결될지 새로운 지도자로 인식될지 애매한 상황에서 “동료 시민”은 그에게 차별화 전략이자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자신은 윤석열 대통령뿐만 아니라 기존의 정치인과도 다르다는 주장이다.
그는 윤석열 키즈이자 신자유주의적 정치인이다. 나는 그의 “동료 시민”이 시대의 요구를 저버린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질주로 인해 국가, 학교, 병원, 군대 등 공동체의 역할이 사라지고 삶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통치 체제이다. “이게 나라냐”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회 시스템의 총체적 붕괴에 대한 절망이 담겨 있다. 개인은 자기 계발과 힐링을 거쳐 ‘욜로’에서 ‘불멍’에 이를 정도로 지칠 대로 지쳐 있다. 만성 실업과 기후 위기는 ‘덤’이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를뿐더러 당대는 정치인 개인의 탈권위 여부가 중요한 상황이 아니다. 국가는 권력을 가지고 교육과 의료, 복지, 경제적 평등 실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시장에 내던져진 국민은 정치 지도자가 동료 대접을 해줘서(?)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끊임없이 국가의 책임을 요구하고 싸워야 한다.
한국사회의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얼마나 클까마는, 한동훈 위원장 같은 보수 세력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너무 좁다는 점이다.
세계 자본이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요구되는 국가 지도자는 유능해야 하고 부정의를 타파할 분별력과 힘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지도자는 ‘나’와 같은 처지의 동료가 아니라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고 대외 관계에서 당당한 리더다.
“동료 시민”은 집권 여당 리더의 존재 의미를 ‘일반 시민에 플러스 원’으로 만드는 언설이자, 국민을 상대로 각자도생의 지옥에서 알아서 살라는 메시지이다. 대신 자신은 ‘부드러운 동료’로 남겠다는 것이다. 욕망은 있으나 욕먹기는 싫다? 그렇다면 정치를 할 필요가 있을까. 당장 집권당의 비상대책위원장직부터 내려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