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만인산 성명’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때는 구한말. 소격동 한 주사는 이 판서에게 줄을 대어 밀양군수에 임명된다. 무능력자가 관직에 오르면 결과는 뻔하다. 재정은 파탄지경, 군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임기가 끝나가자 한 주사는 유임을 위해 여론을 조작한다. 신문을 이용해 자신을 청백리로 포장하고 시정잡배를 동원해 ‘만인산’을 만들게 한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만인산은 1만 명의 이름을 적어넣은 양산이다. 선정을 베푼 지방관에게 백성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기념품이다. 한 주사는 싫다는 백성을 협박해 만든 만인산을 이 판서에게 보여준다. 이 판서는 유능한 인재를 알아본 자신의 안목을 자화자찬하며 한 주사의 유임을 위해 전력을 다한다. 이해조의 소설 <만인산>(1909)의 전반부 줄거리다.

한 주사는 탐관오리다. 그는 백성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보이려고 만인산을 만들었다.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전국 각지의 박물관에 소장된 만인산은 이와 같은 조작의 산물일 가능성이 높다.

현전하는 만인산 7점은 모두 조선 말기의 유물이다. 이 중 충청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교동부사 전세진의 만인산은 1890년 강화군민들이 만들어준 것이다. 전세진의 첫 부임지는 경남 남해였다. 그는 이곳에서 조운선 제조와 운영, 각종 인사에 개입하여 무려 2만3910냥에 달하는 뇌물을 받았다. 1883년 암행어사 이헌영이 밝혀낸 사실이다. 전세진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무슨 재주인지 오래지 않아 유배에서 풀려나 교동부사에 임명되었다. 그가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적에 백성들이 만인산을 만들어준 것이다.

울산박물관 소장 1887년 언양현감 윤병관의 만인산도 수상하다. 윤병관은 언양현감에서 물러난 뒤 종성부사로 이임했다. 이때 거액의 공금을 횡령해 전북 위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남원부사가 되었으나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동학농민운동을 증언한 <영상일기>에 따르면 윤병관은 “아전을 보내 민간에서 토색질을 하니 민심이 흉흉했다”. 청렴하던 관원이 탐관오리로 변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탐관오리였을까.

만인산은 비싸다. 1896년 부패혐의로 고발된 희천군수 경광국의 횡령액 8000냥 중 2000냥이 만인산 제작에 들어갔다. 백성을 위하는 지방관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백성이 만인산을 만들었다면 이미 실패한 수령이다. 지방관의 임기는 2, 3년이 고작이다. 일개 고을 수령이 무슨 힘이 있다고 그사이에 대단한 업적을 남기겠는가. 그런데도 무리해서 만인산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의 이름을 이용하여 여론을 조작하기 위해서다.

만인산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빼곡하다. 진짜 1만명은 아니다. 넉넉잡아 2000명 정도다. 일부를 제외하면 이름뿐이니 누가 누군지 알 수 없다. 확인하고 싶어도 찾을 길이 없다. 이 점은 1만명이 연명한 상소 ‘만인소’ 역시 마찬가지다. 만인소는 공론정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여론몰이의 상징이며 정치적 퍼포먼스에 가깝다. 오늘날의 집단성명과 마찬가지다.

‘대장 64명을 포함한 예비역 장성 1000여명’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찬성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실명은 26명만 밝혔다. 나머지는 유령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전국 교수 5000명’의 시국선언이라는데 소속과 성명을 밝힌 건 몇 사람뿐이다. 그냥 많단다. ‘50개 시민단체’의 합동성명이라지만 명단에 낯익은 단체는 드물다. 검색해도 활동 기록이 없다. 1인 단체거나 성명 발표를 앞두고 급조한 단체로 의심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 의사를 표명하는 서명운동도 이름, 주소, 연령을 함께 기입해야 유효하다. 요건을 갖추지 않은 서명은 무효다. 이름조차 당당히 밝히지 못하는 자들의 성명이 무슨 소용인가. 공공연한 여론 왜곡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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