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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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치킨과 짜바기 치킨은 치느님이다. 닭요리도 진급한다. 제사상, 잔칫상 제일 좋은 자리에 올라가더니 기어이 그 자체가 ‘느님’이 됐다. 그 명명 배경에는 아픔도 있다. 치킨 말고 우리를 위로하는 값싸고 맛있는 요리가 없다는 뜻이다. 튀겼지, 단백질이지, 통으로 한 마리를 다 먹을 수 있지, 더구나 시키면 온다! 닭은 생명이고 고기라 언제나 귀한 것이었다. 사위가 오면 씨암탉이라는 말이 상징한다. 닭은 크기부터 잡기 좋은 육류다. 놓아 기르는 닭 중에 접대할 손님 수에 맞게 크기를 정하면 된다. 도살도 비교적 간편하며, 손질도 쉽다. 돼지는 기르는 데 오래 걸리며 집 농사 규모가 크고 좋아야 줄 먹이도 충분히 생긴다. 키우고 싶다고 아무나 기르는 가축이 아니었다. 소는 말해 무엇하랴. 경운기를 누가 함부로 잡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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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겨울밤 노란 귤처럼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팔자 좋은 소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렸을 때는 초겨울이 되어 아침 세수에 피부가 뻣뻣해지면 우울증이 올 지경이었다. 당도할 겨울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없는 사람에게 겨울처럼 두려운 것이 있던가. 경제를 일구는 일은 부모님 몫이었지만 없는 집 아이들은 일찍이 마음부터 힘겨운 살림을 살았다. 아버지가 연탄 살 돈이 있는지, 김장은 충분한지, 마지막 학기 등록금은 제때 낼 수 있는지 가늠을 하고도 남았다. 그때 몇년은 중동에서 전쟁이 나서 기름값이 올랐다. 박정희의 경제 드라이브로 오르던 총생산도 고개를 처박았고 어른들은 나라가 사네 마네 걱정을 했다. 수학이나 열심히 풀고 영어 단어 외워야 할 때 왜 그런 어른들 고민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고약한 등유 타는 냄새가 외려 반갑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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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양고기 어떠세요 “경성도수장에서 도살되어 부민이 먹은 고기는 소가 2466두, 도야지 1393두, 양이 1두….” 1935년 2월의 신문 기사다. 도수장은 도축장이다. 부민이란 서울시민이다. 소가 돼지보다 많은 게 눈에 띈다. 양이 한 마리 포함되었다. 도축량을 알리는 당시 신문 기사에는 양이 몇마리나마 빠지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서울의 외국공관이나 호텔에 공급하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인은 오랫동안 양고기를 더러 먹었다. 그러다 점차 안 먹는 육종이 되었다. 1978년 경향신문 기사에는 “별미 양고기”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당시 고기 공급 부족으로 파동이 일어났는데 양고기도 맛있으니 먹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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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순대가 비싸진다 떡볶이 파는 평범한 동네 노점이랄까, 시장 좌판 가게가 점점 줄어든다. 입맛이 바뀐 것인지, 먹을 게 많아서인지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불후의 일등 간식이 왕좌를 내놓는 것 같아 슬프다. 불후라고 썼지만, 이건 어폐다. 영원해야 불후인데, 영원하지 않을 예감이니까. 얼마 전 한 초등학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아이들에게 제일 즐기는 간식을 물어보았다. 첫째가 마라탕, 둘째가 탕후루였다. 한때의 인기 정도로 생각했던 마라탕은 자리를 굳힌 느낌이다. 떡볶이를 밀어냈다. 매운 음식은 중독이 되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는데 마라탕이 이제 그들 말대로 ‘원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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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뜬금없는 블루크랩 소동 요즘 언론을 달구는 기사 가운데 이탈리아 꽃게 얘기가 있다. “당장 수입해서 먹자!”는 주장이 댓글에 돌더니, 정말로 수입하겠다는 회사가 나섰다고 한다. 어떤 커뮤니티에는 구입 예약을 받고 있다는 유통회사 광고문도 나오고 있다. 현지에서는 싸지만 수송비용과 이윤 등을 따지면 별로 쌀 것 같지 않다거나, 우리 꽃게도 요즘 싼데 굳이 종도 다른 게를 수입해서 먹겠는가 하는 의문도 있다. 이 해프닝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는 이 꽃게(정확하게는 푸른 게이고, 학명은 Callinectes sapidus이다)를 먹지 않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하지만 사실관계는 다르다. 이 게, 즉 현지에서 ‘그란키오 블루’라고 부르는 녀석은 70년 전쯤 지중해로 도래한 종으로 이미 식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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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우유는 누구 손으로 만들어지나 현대 한국 식품사에서 ‘남아돈다’고 늘 걱정하는 대표 주자는 우유가 아닌가 싶다. 이미 1970년대에 우유가 남아 당시 농림부가 묘안을 짜내고 있다는 신문 기사가 있다. 내가 그 무렵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각 반마다 강제로 할당해 우유를 사먹도록 했다. 담임이 아이들을 붙들고 하소연하면서 ‘우유 급식 신청서’를 떠맡기던 기억이 있다. 삼각뿔 모양 우유팩에 빨대를 꼽는 기술을 초등학생들이 유감없이 선보이던 시대였다. 인기 MC 임성훈과 최미나가 광고하던 “이렇게 해서 요렇게 마시는” 우유도 그때 나왔다. 카톤팩이라는 혁신적 포장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사용되는 놀라운 고안이었다. 우유 소비는 늘 부진을 거듭해 내가 군 복무를 한 1980년대에도 병사들에게 우유를 먹였다. 일주일에 한두 번 주던 것이 나중에는 매일 공짜로 보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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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오늘은 속이 좋지 않구나 초등학교 6학년을 얼추 마쳤을 때 무슨 일인지 겨울방학도 하기 전에 학교에 가지 않았다. 놀다가 그랬는지, 아니면 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달필로 한자를 섞은 편지를 보내오셨다. 나는 곱은 손이 다 부르트도록 야산으로, 골목으로 쏘다녔을 것이다. “부모님께. 저는 찬일이 담임 봉규석입니다.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고…. 비록 어려운 살림에…. 이렇게 편지를 보내니, 졸업식에 꼭 참석하도록 부탁드립니다….” 한 반 80여명 중에 전화 있는 집이 열도 안 될 때였던 것 같다. 개인 간 거래하는 백색 전화기가 집 한 채 값은 될 100만원쯤 할 때였으니까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우리집엔 당연히 전화가 없었다. 그리하여 선생님이 통지표를 함께 넣어 편지를 보내셨다. 혹시라도 머지않아 열릴 졸업식에 오지 않을까 걱정도 하셨던 거다. 어린 마음에도, ‘아, 선생님이 나를 기억해주시는구나’하는 생각에 작은 감동을 했던 게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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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토종닭은 어디 갔을까 닭고기에 대한 시중의 신화는 여전하다. 산 닭을 잡아주던 닭전, 아버지나 어머니의 기억에 등장하는 닭백숙이 주로 그 신화의 대상이다. 요즘 팔리는 닭에 대한 불신이 깊어질수록 이런 신화는 다시 소환된다. 나 역시 그 기억을 여러 번 말하곤 했다. 아버지가 아버지다울 때는 전기구이 통닭을 사오시거나, 산 닭을 잡으실 때였다고. 얼마 전에 전라도 취재를 갔다. 당대는 오직 프라이드치킨의 시대 아닌가. 그래서 다른 품종의 닭, 다른 닭 요리는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전라도의 여러 지역은 아직도 이른바 ‘토종닭’의 소비가 많다. 여기에도 신화가 개입되는데 이를테면 ‘놓아기른 닭’이다. 더 엄밀히 말하면 ‘토종닭’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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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돼지 등심의 괄목 닭발을 요리에 써보려다가 포기했다. 손질도 어려운데 비싸다. 좋은 건 ㎏당 6000~7000원이나 한다. 한편으론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닭발이 비싸면 닭고기 가격이 조금이라도 싸진다. 버려지는 부위가 적어야 고기 가격이 안정된다. 삼겹살이 비싸긴 해도 고만고만하게 버티는 건 싸게 취급되던 돼지의 여러 부위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돼지 등심과 안심은 대표적인 비선호 부위였는데 돈가스 붐과 다이어트 바람으로 많이 올랐다. 보통 삼겹살 대 등심 가격이 1 대 0.2~0.3 하던 게 1 대 0.5 정도까지 올랐다. 돼지 등심은 구워먹지 않는 게 우리의 불문율이었다. 퍽퍽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이다. 서양에선 가장 비싼 스테이크감인데! 한국의 요리사들이 이 선입견에 도전했다. 바로 뼈등심, 돈마호크라는 별난 작명을 얻은 방식이다. 등심에 아삭한 비계와 뼈를 붙여 자르니 스테이크가 되었다. 돼지 가치가 부위 전체로 고르게 분포되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젠 인터넷 쇼핑몰에서 클릭 한번으로 이 고기를 살 수 있다. 유튜브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르게 전파되는 당대의 정보전달력 덕이다. 덕분에(?) 요리사들은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겼다. 어떻게 하면 인기를 얻어낼 숨은 부위를, 요리방식을 선보일 수 있을까 하는 문제다. 자극도 되지만 부담스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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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금육일, 금어일 요새 낚시가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낚시 하면 내수면의 저수지에서 하는 민물낚시가 가장 흔했다. 갯바위나 배에서 하는 바다낚시는 비용도 많이 들고, 이동선이 길어서 여유 없이 살던 1980년대까지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저수지에 대낚시를 드리우고 찌를 바라보며 명상에 빠진다는 동양적 강태공을 떠올리는 문화가 지배적이기도 했다. 점차 호쾌한 박력이 있는 바다낚시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바다낚시는 회를 즐기게 된 1990년대 이후의 식생활과도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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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광어냐 넙치냐 <양철북>으로 유명한 소설가 귄터 그라스의 작품 중에 <넙치>가 있다. 이 종이 우리나라의 넙치와 같은 종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넙치가 광어와 같은 어종이라는 걸 모른다. 두 호칭이 모두 표준어인데 광어만 유독 쓰이기 때문이다. 민중 언어로는 넙치라는 말이 원래 더 폭넓게 쓰였는데, 광어가 대세가 된 것은 1980년대 양식 보급 때문이다. 광어가 널리 양식에 성공하면서 시중에 팔릴 때 광어라고 표기됐다. 그 과정을 잘 알 수 없는데, 아마도 광어라고 한자어로 표기해야 더 고급 어종으로 대우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양식 광어는 회 대중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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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우리 부엌칼은 어디에 옛날 어머니가 밥하시던 사진 한 장을 우연히 보았다. 사극에 나오는 그런 칼이다. 검은색에 날만 희게 번뜩이던. 약간 환도처럼 굽어있어서 숭덩숭덩 무언가 썰 때 리듬감이 있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 여쭤보니 칼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요즘 장터에 가면 이런 칼이 보인다. 조선 칼, 한국 칼 또는 그냥 부엌칼이라는 이름의. 요새 요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져서인지 칼도 눈길을 많이 받는다. 인터넷 칼 전문점은 꽤 매기가 좋은 것 같고, 명성이 높은 전북 남원의 어느 장인이 만드는 칼을 사려고 했는데 구할 수가 없다. 매진이다. 한 가지 의문. 한국의 부엌칼은 어떤 계통을 가지고 있을까. 지금 대장간이나 명인이 만드는 그런 칼이 적어도 수백년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일까. 옛 그림을 보면 궁중 연회나 고위 관료의 잔치에 숙수들이 칼로 요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체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모양이다. 길이와 폭은 제각각인데, 칼등이 약간 호를 그리며 칼끝이 버선코처럼 솟아 있다. 그림으로는 우리가 부엌칼이라고 하는 모양과 비슷해 보인다. 문제는 소재며 제작방식이다. 한 전문가는 ‘참쇠’가 아주 튼튼하고 강해서 질 좋은 부엌칼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한데 참쇠가 무엇인지, 그 소재로 누가 칼을 만드는지, 만든다면 어떻게 구해 쓸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