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찬일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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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피곤한 사장님들 “한국식 짜장면(韓式 炸醬麵).” 한국 짜장면을 중국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중국과 다르다는 것이다. 짜장면은 우리 인생에서 선택을 고민하게 하는 음식이다. 짜장면은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세계에서 제일 많이 먹는 사람은 단연 한국인이다. 중국에서는 여러 지역에서 먹기는 하는데, 인기가 높지는 않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과 동북지방, 홍콩 등지에서 먹어보았지만 파는 가게를 찾는 것 자체가 힘들다. ‘한국식 짜장면’이란 말을 중국에서 쓴다는 건, 많이 다르다는 뜻이다. 짬뽕은 동북지방에서 온 화교들의 음식인 초마면(炒碼麵·차오마미엔)이 일제강점기에 변용된 언어라고도 한다. 일본에 짬뽕이란 음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오래된 화교 주방장들은 대체로 초마면설을 지지한다. 초마면은 고기, 채소 등을 볶아서 면을 말아내는 음식이라고 사전적으로 규정한다. 요새 육짬뽕이라는 게 뜨는데, 이것이 전통 초마면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현재의 짜장면이든 짬뽕이든 중국에서는 별로 먹지 않는 음식이고, 먹는다고 하더라도 많이 다르다. 그래서 한국에서 파는 짜장면과 짬뽕은 거의 한식에 가깝다고 말하는 이도 있고, 나도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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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최저임금이 올라서 그렇다는 말 경기가 나빠지면 체감으로 먼저 느끼는 게 식당이다. 술 덜 마시고 비싼 밥 덜 먹는다. 코로나19의 긴 터널에서 겨우 벗어난다고 했을 때 식당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얼추 끝나니 그다음에는 국제적인 불황이란다. 식당이 잘되고 말고는 워낙 복잡한 원인이 있다. 맛과 유행, 운, 요즘 같은 시대에는 리뷰가 상징하는 이른바 ‘온라인 마케팅’에 관한 여러 가지 변수들까지 얽혀 있다. 이런 와중에 인건비 문제도 화두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주휴수당이 문제라는 말도 나온다. 더 넓혀 들어보면 지난 정부에서 최저임금을 너무 올려서 그렇다고도 한다. 나는 그저 식당 동네 바닥에 있는 사람이라 주변의 온도만 감지할 뿐, 거시적인 노동 문제, 임금 문제는 모른다. 하지만 자영업 시장에서 업주들은 최저임금에 예민하고, 지난 정부의 적극적인 최저임금 보장 정책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넓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미 최저임금과도 별 관련이 없다. 최저임금 딱 맞춰서 주는 식당도 드물다. 사람이 모자라니 서로 구하려고 더 높은 임금을 제시해야 한다. 구인이 안 되니, 최저임금에 맞춘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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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김장과 연탄, 그리고 겨울풍경 요즘은 거의 지불하지 않는데 오랫동안 김장 보너스라는 게 있었다. 대우 좋은 공기업과 대기업에서 많이들 줬고, 얼마라도 안 주면 안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월급은 밀려도 김장 보너스는 줘야 한다는 희한한 세상이었다. 김장에 목숨 걸던 한국인의 풍습이었다. 1994년도 기사를 보니 김장 보너스가 본봉 기준으로 포항제철 150%, 금성사 50%라는 뉴스가 ‘재계에 따르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1997년도 연합뉴스는 “김장 보너스가 사라지고 있다”고 길게 기사를 냈다. 보너스라는 형태의 추가 임금은 이미 주식회사가 생겨나던 일제강점기에도 있었는데 김장 보너스라는 이 별난 제도가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1960년대쯤 공무원이 먼저 시작한 것도 같다. 월급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후생을 두껍게 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설날 무렵 주는 떡값 보너스와 함께 사람들이 크게 기대하는 보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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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1930년대 목로주점 순례기 현대에 술집이란 매우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다. 접대받는 비싼 술집부터 정말로 막걸리 한 잔 값만 내고 버틸 수 있는 선술집도 있다. 굵직한 역사적 사건은 언론에서 잘 다뤄서 자료가 많은데, 술집에 대한 기록은 참 찾기 어렵다. 먹는 얘기 하는 건 좀스럽고 선비가 아니라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100년 전 술집 문화를 찾아보려면 신문엔 거의 없고 잡지에서 몇 편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잡지야말로 신문이 다루기 어려운 저자의 바닥을 훑어 깊게 쓸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는 인쇄술과 종이생산이 크게 발달하면서 잡지 출간도 늘어나던 시기였다. 당시 ‘별건곤’은 아주 흥미로운 대중잡지였다. 민중의 술집이라 할 대폿집, 선술집 기사가 있나 봤더니 마침 몇 꼭지가 있다. 서울은 역시 종로가 조선인이 모이는 술집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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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갈비 유정 한국인의 갈비사랑은 유별나다. 옛날 갈비 뇌물이 성행했고, 매점매석도 흔했다. 갈비뼈 사이의 졸깃한 살을 발라내어 갈빗살이라 이름 붙여 파는 최초의 민족이다. 20년 전쯤, 외국에선 버리다시피 하는 이 부위를 수입해서 초대박을 친 구잇집이 강남에 생겼다. 싼 부위이니 이문이 좋았고, 손님들이 좋아했다. 값싸고 맛도 좋은데 무엇보다 갈비라는 이름이 들어간 게 주효했다. 당시 일반 갈비를 먹자면 1인분에 4만~5만원은 했는데 고작 3000~4000원밖에 하지 않았다. 이 갈빗살은 지금도 한국이 세계 최대 소비국가일 것이다. 대충 갈비에 끼워 팔리거나 세부 정형할 때 자투리로 버려질 부위가 어엿한 이름을 달고 파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경북 영주는 이 부위 살을 대표 향토음식으로 밀고 있을 정도다. 시내에 갈빗살구이골목이 있다. 기회가 되면 꼭 가보시라. 아주 싸고 맛도 좋다. 강력 추천한다. 이른바 ‘가성비’가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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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값싸진 사골’의 사회적 변주 한때 선물로 인기 있던 게 소꼬리와 사골이었다. 소꼬리는 얼마나 인기가 높았던지 꼬리 외에 반골이라 부르는 엉덩이뼈를 붙여서 한 채를 기준으로만 팔았다. 요즘도 한우꼬리는 그런 판매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소꼬리곰탕은 한식당에서도 비싼 메뉴였고, 소꼬리찜은 스테이크보다 비쌌다. 수입 꼬리가 들어오면서 이제는 큰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한우 꼬리도 20년 전에 비하면 값이 떨어졌다. 20년 전 가격이 그대로다. 오른 물가에 비하면 엄청 싸진 셈이다. 사골도 그렇다. 툭하면 가짜가 돌아다녔다. 갈비짝 다음 가는 인기 선물이었다. 고급 백화점에서 많이 팔았다. 몸보신용으로도 수요가 많았다. 마트에서 세일을 하더니 비인기 품목이 되었다. 이유가 있다. 우선 한우 공급이 늘었다. 더 많이 기르는데, 사골 수요는 늘지 않고 수입이 많다보니 남을 수밖에 없다. 미국·호주 이민을 간 사람들이 현지에서 누리는(?) 즐거움이 소꼬리, 사골이 엄청 싸다는 것이었다. 서양도 먹기는 하는데 싸다. 사골이 특히 싼데, 레스토랑에서 소스 만드는 데나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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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해조를 다시 본다 바다는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풍족히 준다. 한국은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과 함께 세계적인 수산물 소비국이다. 양식도 활발해서 횟집은 양식어종이 없으면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양식은 이중 생산구조를 보일 정도로 대단하다. 전복이 엄청난 희귀어물에서 대중적인 물건이 된 건 양식 덕인데, 역시 양식한 미역, 다시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해양수산물은 과거 단백질 공급처에서 미각의 산지가 되었다. 제철음식 하면 시민 누구나 수산물을 떠올리게 된 것도 오래된 일이 아니다. 심지어 방어철에는 홍대앞 횟집에 젊은이들이 길게 줄을 서는 특별한 현상이 벌어진다(방어는 10년 전만 해도 서울사람들은 잘 모르는 어종이었고 값도 쌌다). 대방어, 대방어 하는 말이 11월이 되면 뉴스와 SNS의 키워가 될 정도다. 민어는 또 어떤가. 얼마나 여름 유행을 타는지, 유명 산지는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서 손님을 토해낸다. 전, 탕, 부레와 껍질, 회로 이루어진 세트메뉴를 기계적으로 먹고 금세 떠난다. 남도 식당 특유의 얇은 비닐이 식탁에 수십 장 미리 쌓여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손님이 몰린다는 뜻이다. 이런 세상에 불길한 뉴스가 끊이지 않는다. 해산물 섭취는 미세플라스틱과 연결되어 있다든가, 겨울의 노로바이러스 파동 같은 것들이다. 무엇보다 수자원 고갈 뉴스는 위협적이다. 대체로 서구의 뉴스원들은 비관적이다. 2050~2060년이면 완전 고갈에 가까워진다고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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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마늘에 진심인 나라 옛날에 팀스피릿이라는 한·미 합동훈련이 있었다. 남한강 지류의 어느 지역에 부대가 도착한 것은 깊은 밤이었다. 며칠간 못 자고 걸으며 피곤했던 부대는 얼른 텐트를 치고 잠이 들었다. 아침 녘에 시끄러운 다툼 소리가 나서 밖을 내다보았다. 늙은 농부가 우리 부대의 책임 있는 부사관에게 따지고 있었다. 봄마다 군대 훈련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밭을 뭉개놓으면 어떡하느냐, 훈련도 좋지만 농사는 지어야 너희들도 반찬 해먹을 거 아니냐, 농사 다 망쳤으니 어떡할 거냐. 보니, 마늘밭이라고 했다. 야밤에 들이닥친 부대로서는 공터가 있길래 얼른 지휘용 텐트를 쳐버린 것이었다. 부사관이란 분들은, 그 시절 농촌 출신이 많아서 척하면 사정을 다 알고 있으니 더 미안한 일이었다. 부사관이 고개를 연신 숙이며 진심으로 사과를 하는 게 어린 병사였던 내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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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장마철, 도시락의 아련한 기억 장마가 올해는 제법 오는 모양이다. 장마전선이라는 말에 귀를 곤두세우고 뉴스를 듣던 때가 있었다. 실내 생활이 많은 요즘과 달리 과거는 바깥 생활이 흔했다. 날씨는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깥 채비가 큰일이었다. 도보 생활자들이 거의 전부이던 시절이었다. 살 부러진 대나무 비닐우산, 우산을 수리하던 동네 가게와 작은 개천이 범람하던 장마철의 기억. 우산을 잃어버리면 세상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우산 살 돈이 없어 비를 쫄딱 맞고 귀가하던 사연도 다들 있으리라. 기분이 그런지 몰라도 그 시절은 장마철도 참 길었다. 허름한 집 벽에 곰팡이가 피어야 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시작됐다. 장마철이 되고 보니, 옛날 엄마들은 뭘 식구들에게 먹였을까 싶다. 호박 칼국수에 된장찌개, 미역 넣은 오이냉국, 그것도 없으면 마른멸치에 고추장과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보리밥이나 통일쌀 유신쌀밥을 넘겼다. 강된장에 호박잎 쌈도 먹었던 것 같다. 그때 아이들은 매운 풋고추를 척척 먹었다.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주는 건 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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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조선 칼은 다 어디 갔을까 주방장님은 무슨 칼을 쓰세요? 요리사인 나는 이런 질문을 종종 받는다. 부엌칼 씁니다. 상대가 빵 터진다. 농담하는 줄 안다. 부엌칼이란 말은 뭔가 아마추어 냄새가 나서 그런 듯하다. 전문 주방장이 부엌칼이라니. 부엌칼이란 말은 전쟁시대의 용어다. 적을 베는 무기가 아니라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칼이란 뜻이다. 지금도 하는지 모르겠는데, 예전에는 철마다 파출소에 이런 계도문(?)이 붙어 있었다. “총포도검류 자진신고기간 ○○○○년 ○월 ○일부터….” 도검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존재다. 같은 칼이라도 보는 시각에 따라 무기가 되기도, 부엌칼이 될 수도 있다. 이른바 ‘사시미칼’이 그렇다. 듣기로, 조직적인 깡패들이 무기를 갖추긴 해야 하는데, 일본도 같은 장검을 갖고 있으면 총포류단속법에 걸렸다. 그래서 사시미칼, 즉 회칼을 준비했다고 한다. 칼은 그것이 어디에 놓여 있느냐 하는 존재의 상황이 물질의 성격을 바꾸기도 한다. 일식집 부엌에 놓여 있는 회칼은 아무리 칼같이 벼려 놓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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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우리 먹거리에 ‘팜유·식용유 경보’ 얼마 전 인도네시아가 팜유 수출을 잠정 중단한다는 뉴스가 나왔다. 팜유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많아 대중에게 큰 이슈가 된 뉴스는 아니었다. 하지만 언론은 이 사태의 파장을 분석하기 바빴다. 우선 물가 상승이다. 과자며 라면이며 대개 팜유를 쓴다. 심지어 아이스크림에도 팜유를 쓰는 경우가 흔하다. 1989년 삼양라면 우지 파동을 기억하실지 모르겠다. 공업용 소기름을 썼다고 해서 식품기업이 기소된 사건인데 결국 무죄가 났다. 어떻게 보면 요즘 문제가 되는 ‘검·언 유착’의 한 예이기도 하다. 언론의 받아쓰기 관행, 검찰의 무리한 기소, 대중의 무지 같은 게 한데 어우러진 우리 사회의 치부를 보여주는 입맛 쓴 소극이었다. 어찌 되었든, 저 사건 당시만 해도 소기름으로 라면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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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명이의 맛 …그것 참 알싸하네 초근목피는 어느 시대나 어느 민족이나 먹었던 음식이다. 초근목피 중의 하나가 바로 나물이다. 탄수화물이나 고기는 늘 부족했고 기근은 사람들을 들판으로 내몰았다. 봄나물의 맛이야 좋은 것이지만, 먹을 게 없어 들판을 헤매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씁쓸한 일이기도 하다. 고기와 감자, 빵만 먹고 살았을 것 같은 유럽도 그런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나물을 먹는다. 푹 삶아 간을 하고 기름을 뿌려 요리에 곁들인다. 한국처럼 야생 나물을 굳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는 점 정도만 다르다. 물론 버섯도 나물로 치면 그렇지도 않다. 야생 버섯은 최고로 비싼 재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