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무망의 풍경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 봄날, 무망의 풍경

낱낱의 한자를 읽을 때 그 음 앞에 뜻을 새겨 다는 것을 훈(訓)이라고 부른다. 하나의 한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마련인데, 한자를 익히는 초학자를 위해 편의상 ‘대표 훈’이라는 것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해를 돕기 위해 관습적으로 붙여 온 대표 훈이 오히려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공변될 공(公)’ ‘벼리 기(紀)’ ‘모름지기 수(須)’ ‘지게 호(戶)’ 등의 훈을 추가 설명 없이 단박에 이해하기는 어렵다. ‘망령될 망(妄)’도 그런 예의 하나다.

‘망령(妄靈)되다’는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데가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망상(妄想), 망언(妄言), 노망(老妄), 경망(輕妄), 허망(虛妄) 등의 어휘에서 볼 수 있듯이 망(妄)은 ‘이치에 어긋나다’ ‘헛되다’ ‘속이다’ ‘함부로’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반면 진실무망(眞實无妄)이라는 표현처럼 망(妄)의 상대어는 조금의 거짓도 없는 천진무구함이다. 그 상태를 나타낸 것이 주역의 무망(无妄) 괘인데, 하늘() 아래에 우레()가 있는 모양이다. 갑자기 울려 천지를 뒤흔드는 우레에 혼비백산해서 감싸고 살던 허위를 떨쳐버리고 어린아이처럼 진실된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우레가 치면 겨우내 땅속에서 잠자고 있던 만물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무망 괘는 며칠 전 지나간 절기인 경칩(驚蟄)과 연결된다. 움츠려 숨어들었던 모든 존재를 깨워서 아무런 사심도 없이 그저 각자 타고난 생명력에 충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무망 괘이다. 하늘(乾)의 도리를 따라 움직인다(震)는 괘의 형상을 본받아서 가장 적절한 때에 만물을 길러 무성하게 자라게 하는 것이 진정한 정치라고 했다.

마스크 없는 얼굴로 새 학기를 맞은 봄날의 대학 캠퍼스는 재잘대는 학생들로 북적댄다. 헛된 말과 헛된 욕심이 횡행하는 허망한 정치판을 보며 낙담하던 눈에, 마치 묻혀 있던 보물 상자를 열어젖힌 듯이 생명력 넘치는 무망의 풍경이 들어온다.

코로나19의 긴 어둠 때문인지 어느 때보다도 실감 나게 들이닥치는 이 봄과 함께,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이 다시 펼쳐지기를 소망해 본다. 그래도 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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