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음과 있음의 역설

송혁기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송혁기의 책상물림] 없음과 있음의 역설

자신의 집에 ‘오무헌(五無軒)’이라 써 붙인 이가 있었다.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다섯 가지 중 자신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다섯 가지를 하늘에서 부여받았으므로 이를 실마리로 삼아 확충해 감으로써 본래의 바름을 회복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는 게 당시의 통념이었다. 이 다섯 가지가 없다는 말은 그저 겸양의 표현으로만 받아들이기 어려운 면이 있다. 19세기 문인 심대윤은 ‘오무’에서 “천지와 성인은 인(仁)하지 않다”고 말한 노자를 떠올렸다.

노자의 말은 반어와 역설로 가득하다.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양은 모양이 없다.” 우리 귀는 소리에 민감하지만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엄청나게 큰 소리는 들을 수 없으며, 우리 눈은 모양을 잘 식별하지만 코끼리 발 앞에 선 개미처럼 상대적으로 너무 큰 모양은 모양으로 인지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우리가 듣고 보는 소리와 모양은 진정한 소리와 모양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仁)이 그저 일시적으로 베푸는 동정에 그친다면 이는 본래의 인과 전혀 다른 것이다. 천지와 성인이 인하지 않다는 역설은 우리가 통상 생각해온 인이 무엇인지를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오무헌의 주인이 자신에게 다섯 가지가 없다고 한 의도 역시, 입만 열면 인의예지신을 내세우는 세태를 삐딱하게 보고 은근히 비판하려는 데에 있다. 정답이 이미 나온 것처럼 성인의 도(道)를 추구한 지 수천년이 되었는데 정작 세상은 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어지러워져만 가는 것일까? 너도나도 입에 올리는 인의예지신이 진정한 인의예지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없는 것이고 오무헌 주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모두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한 고정 값으로 여기며 그 위에 서 있는 기반이, 실은 시간의 흐름 가운데 변화해온 어느 단계의 제한적인 조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에서 보아왔다. 우리의 눈과 귀를 가리는 통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또 다른 시각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전을 읽을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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