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과 탈시설 로드맵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한국의 장애 관련 법률 중 정부가 자발적으로 만든 건 1977년 특수교육진흥법과 1981년 심신장애자복지법 두 개뿐이다. 그 이후 법들은 모두 장애인들의 현장투쟁을 통해 만들어졌다. 장애계에서는 이 두 법을 ‘홍길동법’이라 칭했다. 양자의 법에 장애인 교육을 진흥하는 내용도 장애인 복지를 보장하는 내용도 전무하여, 차마 그 명칭대로 불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이달 초 국무총리 소속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는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탈시설 로드맵)을 발표했다. 2012년 8월부터 1842일간 진행된 농성의 성과로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에 탈시설이 포함되었지만, 4년 넘게 허송세월하다 임기를 불과 9개월 남겨둔 시점에야 그 기본계획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이 탈시설 로드맵은 삼중의 의미에서 ‘홍길동 로드맵’이 되고 말았다.

탈시설(deinstitutionalization)은 197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통용돼왔으며,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와 그에 관한 일반논평 5호에서 정식화된 개념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시설권력을 옹호하며 공문서에서 탈시설이란 용어의 사용 자체를 기피했고, 이번 로드맵에서도 법적 용어로 ‘탈시설 권리’가 아닌 ‘주거 결정권’을 택했다. 장애계가 요구한 ‘중앙탈시설지원센터’ 역시 ‘중앙장애인지역사회통합지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오는 27일 문을 열게 된다. 더 문제가 되는 건 탈시설 로드맵이라는 이름을 단 이 장기 계획안이 사실상 장애인 시설을 공고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는 점이다.

이번 로드맵에 따를 경우 정부는 내년부터 3년간 시범 사업을 시행한 후, 2025년부터 탈시설 정책을 추진해 2041년 완료한다. 20년 후 개인별 주거로 탈시설하는 인원은 5452명인데, 이는 현재 장애인거주시설에서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 2만9086명의 18.7%에 불과하다. 나머지 인원은 공동생활가정 같은 소규모 시설을 두 배로 확대해 흡수하고, 24시간 지원이 필요한 최중증장애인은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으로 이름을 변경한 기존 시설에 남게 된다. 즉 문재인 정부는 탈시설을 탈시설이라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소규모 시설과 주거서비스 제공기관으로 간판만 바꿔 단 시설을 시설이라 부르지 말 것을 종용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탈시설 로드맵이라 불러줄 수 없는 탈시설 로드맵을 만들어낸 것이다. 더구나 정신요양시설에 입소해 있는 정신장애인 9200여명은 아예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홍길동이 반복적으로 소환된 이번 탈시설 로드맵 발표 사태와 관련해 그 이름의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측면을 환기하고 싶다. 홍길동은 단지 허균의 소설 속 가상 인물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는 조선 최초의 민란 지도자였다. 장애인의 삶을 시설 안에 가둬두려는 비장애중심주의적 정치권력과 시설권력의 비열한 공모는 이런 맥락에서 또 다른 의미의 홍길동 로드맵으로 귀결될 것이다. 장애인 차별철폐 투쟁의 역사를 개척해온 이 땅 장애민중이 21세기의 홍길동이 되어 끊임없는 반란으로 맞설 것이기에. 국회 앞에서 5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는 탈시설지원법·장애인권리보장법 제정을 위한 농성투쟁은 그 시작일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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