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차별금지법 제정하라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에서 독립을 해야 했다. 교사가 꿈이었지만 우선 돈부터 모아야 했고, 처음 뛰어든 직업 전선이 술집 주방 일이었다. 외환위기 사태가 터지기 전이라 요식업계 경기가 나쁘지 않았다. 보수도 제법 됐고, 당시에는 숙식을 제공하는 술집이 많았기에 주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이기도 했다. 종로3가 피맛골에 위치한 호프집에서 3년 일했다. 한동안 숙소 생활을 하다 동료 둘과 월세방을 얻어 살게 되었는데, 그중 한 명이 게이였다. 나의 첫 번째 퀴어 친구였다. 정확히는 퀴어임을 나에게 밝힌 첫 번째 친구.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우리나라 퀴어 문화의 중심지였던 지리적 조건 때문이었을까. 40여명의 노동자가 일했던 그 호프집에는 성소수자가 꽤 들고 났다. 누구도 몰라야 했고, 사장에게 알려지면 잘렸다. 이제 와 생각해 본다. 그들은 왜 무고하게 해고당하면서 아무 항변도 할 수 없어야 했나.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왜 스무 살 넘어서야 처음 퀴어 친구를 만나게 되었나. 그러고 보니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나에게는 장애인 친구도 없었다.

지난달 초 변희수 하사가 세상을 떠난 후, 경향신문에는 “‘있음’으로 싸운 성소수자들… ‘없음’으로 내몬 차별과 혐오”라는 제목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기사 제목을 보고 마음이 많이 덜컹거렸다. 문득 어떤 구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장애인운동의 역사를 정리해 2007년 출간한 <차별에 저항하라>의 서장은, 2005년 세계장애인의날 열린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투쟁결의대회의 결의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지난 4년간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장애인계의 노력은 장애인의 존재가 이 사회에서 ‘없음’이 아니라 ‘있음’을 알리기 위한 피나는 투쟁의 과정이었다. 지난 역사 속에서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없음’의 존재였다.”

학창 시절 나에게 퀴어 친구도 장애인 친구도 없었던 이유는, 이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장애인들이 있어도 없는 듯 살아가길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그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 차별금지법이다. 물론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사라지지 않았듯,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성소수자를 비롯한 이 땅 소수자들이 차별받는 견고한 ‘토대’가 한 번에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차별이 ‘재생산’되는 양식에, 즉 차별하는 주체와 차별받는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균열과 변이를 가져오고, 차별과 그에 대한 저항이 지금과는 다른 양태로 전개될 가능성을 생성해낸다.

지금과 다른 세상은 기존 질서와 토대가 한 방에 무너지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저항 속에 ‘차별의 재생산이 조금씩 실패하면서’ 온다. 우리는 적어도 지금과는 다르게, 지금보다는 더 낫게 저항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동성애에 반대한다”거나, 퀴어문화축제 개최에 대해 “거부할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공감대 형성이 먼저”라고 말하는 정치인들이 사라진 세상을 원한다. 그러니 이제 당장,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 그 무기를 들고 우리가 세상을 바꿀 것이니. 지금과 같은 흑백의 세계가 아니라, 무지개 빛깔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낼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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