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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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공자와 살구나무 며칠 전 마트에서 살구를 만나니, 마치 오랜 친구를 본 듯 반가웠다. 좀처럼 전통 과일을 보기 힘든 요즘, 특히 앵두와 살구는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찾기 어렵다. ‘나에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중국이 고향인 살구나무는 <산해경>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역사가 오래다. 요염한 꽃과 달콤한 열매가 일품이며,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고사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살구나무 단의 행단(杏壇)을 어떤 이는 은행나무 단이라 한다. 이런 논쟁이 요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조선시대에도 이수광과 정약용은 행단의 나무를 살구나무로, 이규경과 허목 등은 은행나무라고 주장했다. 최근 중국 칭화대학의 팽림(彭林) 교수는 공자의 행단에 심긴 나무가 살구나무였음을 몇 가지 근거를 들어 입증했다. 그는 공자의 45대손인 공도보가 북송 천희 2년(1018)에 행단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북송시대 이전의 문헌에는 은행이라는 명칭 자체가 사용되지 않았고, 남방 지역에서만 자랐다고 한다. 진(晉)나라 때는 은행을 평중, 송나라 때에는 압각수라 불렀고, 은행이라는 명칭은 1054년 구양수의 시에서 처음 등장하였다고 하니 꽤 설득력 있다. 팽림 교수는 은행나무가 한국과 일본으로 전래된 것은 당나라 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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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앤디 워홀과 무궁화 2500억원! 지난 5월 중순, 앤디 워홀의 매릴린 먼로 초상화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0세기 미술작품 가운데 최고가를 경신하였다. 이는 세계 미술 경매 사상 역대 두 번째 가격이다.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마오쩌둥 등 유명인의 초상뿐 아니라, 코카콜라나 캠벨 수프 캔처럼 일상의 소재를 예술로 끌어들인 앤디 워홀. 그는 고상하고 젠체하는 엘리트 중심의 순수예술에 소시민들의 대중문화와 상업주의를 들이민 팝아트의 거장이다. 워홀은 데이지나 장미, 붓꽃 등을 소재로 한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4년에 제작한 ‘꽃(Flowers)’ 시리즈이다. 단순한 듯 화려한 색이 특징인 그의 꽃 작품을 미술평론가 데이비드 부르동은 “마티스가 오려낸 구아슈(gouache)가 모네의 연못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평했다. 사람들은 이 꽃을 대부분 그저 ‘이름 없는 꽃’으로 생각하지만, 그 꽃은 무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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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이승만과 양버즘나무 청와대 시대가 막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 이후 권력의 상징이던 청와대는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경무대라고 불리다가 윤보선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옛 경무대 앞길이었던 청와대의 분수 광장에서 경복궁 서쪽 담장을 따라 조성된 효자로에는 오래된 양버즘나무(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다. 양버즘나무와 은행나무는 도심 가로수 중에 가장 많이 심긴 나무다. 1956년 ‘신태양’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조지훈의 글에 의하면 서울에 오래된 양버즘나무 가로수가 무성하게 된 것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 한다. 조지훈은 서울 시내의 양버즘나무 가로수 길을 보며 “이승만의 치적 중에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이 플라타너스 문화정책이 유일한 것이라 믿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양버즘나무는 미국 동부지역이 원산지인데,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대략 1880년대 후반으로 추정한다. 일제강점기 초부터 가로수로 심어져 왔지만, 해방 후에는 이승만의 ‘말씀’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왜 하필 양버즘나무에 관심을 쏟았던 것일까. 이와 관련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아, 그 내력을 거슬러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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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법정 스님과 일본목련 도량(度量)이 넓은 김영한이 법정 스님께 시주하여 도량(道場)이 된 길상사. 서울 도심에 있는 사찰이지만, 성북동의 조용한 주택가 사이에 계곡을 끼고 있어 불자가 아니더라도 산책과 사색을 위해 찾는 이들이 많다. 계곡을 따라 들어서면 큰 나무들이 제법 울창하여 마치 깊은 산속에 와 있는 듯하다. 그 안쪽의 호젓한 곳에는 법정 스님이 잠시 거처했던 진영각이 있는데, 안에 전시된 원고와 평소 쓰시던 소품 등이 스님의 검박한 품성을 짐작게 한다. 툇마루 옆에는 일명 빠삐용 의자도 놓여 있어 흡사 불일암을 옮겨 온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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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프리다 칼로와 부겐빌레아 곡절 많은 삶은 예술가의 운명인가. 반 고흐와 베토벤이 그렇고 이중섭과 나혜석이 그렇다. 멕시코의 대표 화가 프리다 칼로. 자화상의 짙은 일자 눈썹에서 기구한 운명과 싸우는 강렬한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작품 중에 유독 자화상이 많은 걸 보면 사회적 굴레와 자기 삶이 처절한 주제였음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페르소나를 표현한 자화상은 평온한 모습이 아니라 하나같이 고통스럽고 때로는 기괴하다. 가시로 살이 찢기고 못이 박힌 가슴팍을 드러내는가 하면, 때로는 화살을 맞으며 피를 흘리거나 심지어 척추는 부러져 있다. 전부 그녀의 잔인한 운명과 시대 상황을 표현한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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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양버들 미소 하나의 의미에 이렇게 다양한 해석을 붙이는 작품이 또 있을까. 바로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 말이다. 웃는 듯 마는 듯, 코웃음도 비웃음도 아닌, 뭐라 콕 찝어 설명하기 어려워 신비롭다고 하는 것일까. 반가사유상처럼 관조의 미소인 듯싶다가도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시니컬한 듯하다. 이 미소를 해석하고자 신경과학자나 해부학자, 심지어 심리학자까지 합세하여 애를 쓰기도 한다. 모나리자 작품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대개 유화는 나무틀에 면이나 마의 천을 씌운 캔버스에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양버들 판재에 그렸다. 유화를 캔버스에 그리기 전에는 나무 판재 위에 그림을 그리는 사례가 많았다. 중세 이전에는 이콘도 나무판에 그려진 것이 많고, 14세기경 이탈리아에서는 양버들, 버드나무, 피나무 등의 널빤지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벽화만큼이나 흔했다. 다빈치는 참나무 판에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린 양버들은 이태리포플러와 흡사한 나무한 나무로, 가지가 하늘로 치솟아 원기둥꼴을 이룬다, 일명 롬바르디아포플러라고도 하며, 이름대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가 원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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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엄택기와 왕벚나무 아무리 세상이 어수선해도 봄꽃은 다시 핀다. 제주도에는 지난주부터 벚꽃이 피기 시작했으니, 이제 곧 벚나무가 곳곳에 만발할 것이다. 벚꽃잎은 바람이 불면 낱낱이 흩날리어 그 매력을 더한다. 벚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는 왕벚나무다. 벚나무 가로수 중 대부분이 왕벚나무이고, 벚꽃축제의 대표 선수가 왕벚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의 유행과는 다르게 정작 우리 선조들은 벚꽃을 찾아 나서거나 특별히 벚꽃 구경을 즐기지 않았다. 벚꽃놀이는 일제강점기 이후에 정착된 문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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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넬슨 만델라와 알로에 얼마 전 넬슨 만델라가 퇴임 후 8년 동안 거주했던 요하네스버그의 저택이 호텔로 바뀌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름하여 생추어리 만델라 호텔. 이 건물은 넬슨 만델라 재단이 소유하고 있었는데, 재단 측에서 운영 자금이 필요해 호텔로 개조했다고 한다. 객실은 5개로 하룻밤 숙박료가 최고 1000달러나 된다고 하니,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생전의 그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차별과 멸시에 대하여 만델라처럼 끈질기고 강력하게 대항하여 결국 그것을 바로잡은 인물도 많지 않으리라. 무려 50년 가까이 지속되던 아파르트헤이트가 무너진 것은 그의 줄기찬 투쟁 덕분이다. 자유와 인권, 용서와 화해의 표상이 된 그는 특히 흑인 인권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인권운동가이자 정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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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위당 정인보와 매화 ‘기미년 삼월 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 만세.’ 위당 정인보가 작사한 삼일절 노래 가사 첫 부분이다. 정인보, 그의 삶은 오로지 역사와 민족으로 수렴된다.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신채호, 박은식 등과 독립운동을 했으며,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제의 문화 찬탈로 우리 것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일부 학자들이 나섰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정인보였다. 국학(國學)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도 바로 그였다. 연희전문학교에서 그가 강의하던 과목을 폐지하자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그는 주체적인 역사와 문화를 바로 세워 우리 고유의 강건한 사상체계를 구축하고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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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태조 이성계와 소나무 ‘함흥차사’로 유명한 함흥에는 이성계가 왕이 되기 전에 살던 함흥 본궁이 있다. 왕의 자리를 물려준 뒤에 이성계는 함흥 본궁으로 돌아와 칩거하였다. 아들끼리 원수가 되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눈앞에서 볼 수 없었던 아버지 이성계. 예나 지금이나 돈과 권력 앞에는 혈육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골육상쟁은 이성계에게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았을 것이다. 사람 대신 나무를 믿었던 것일까. 그는 그곳에 소나무를 손수 심었다. 흔히 ‘함흥본궁송’, 또는 ‘태조수식송(太祖手植松)’으로도 알려진 소나무가 그것이다. 신궁으로 알려진 그가 활을 쏠 때는 이 소나무에 항상 활을 걸어 두었다고 한다. 소나무만큼은 변치 않고 그의 곁을 지켜 주었으니, 그의 호 송헌(松軒)이 우연이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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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알바 알토와 자작나무 날씨가 추워져 영하 10도를 오르내린다. 땅은 꽁꽁 얼어붙고 바람은 매섭다. 나무들도 앙상한 가지를 내놓고 벌벌 떨고 있고, 풀들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이런 추위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나무 중에는 자작나무가 으뜸이다. 한겨울이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툰드라 지방에서도 끄떡없다. 유럽에 최후의 빙하가 물러나고 습하고 나무 하나 없던 때, 가장 먼저 자리를 잡은 것도 바로 자작나무였다. 그래서 자작나무를 흔히 ‘선구수종’이라고 한다. 현재 북유럽의 대표 수종 중 하나가 자작나무다. 강원도 인제의 자작나무숲도 유명하지만, 사람이 심은 것이다. 추위에 강해 한반도에서도 북한의 함경도나 백두산 지역에만 자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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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이태석 신부와 배추 “음식에 대한 사랑보다 더 진실한 사랑은 없다.” 영국 작가 버나드 쇼의 말이다. 한때 오랫동안 외국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특히 우리 음식 생각이 간절했다. 뜨끈하고 얼큰한 김치찌개나 된장찌개는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유학생에겐 대체 불가의 음식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고달픈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보약이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음식이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다. 멀리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 ‘빈(貧)만 있고 부(富)가 없어 빈부의 격차가 없는’ 그곳에서 주민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이태석 신부. 성당보다는 학교를 먼저 짓고 교육과 의료 활동에 매진하였다. 상상을 초월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두 가지에 감탄했다.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과 ‘손만 대면 금방 터질 것 같은 투명하고 순수한 아이들의 눈망울’이었다. 그것이 원동력이 되었을까. 그는 콜레라와 말라리아 환자로 악전고투하면서도 브라스밴드까지 조직하였다. 성직자에 교육자로, 또 의사에 지휘자까지 일인다역을 소화하느라 늘 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