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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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허균과 방풍 요즘은 TV 오락 프로그램에도 온통 전쟁 모드다. 춤과 노래 경연은 물론 퇴역 군인들의 힘겨루기와 요리사들의 대결까지 격렬한 전투다. 음악으로, 힘으로, 또는 맛으로 상대방을 꺾고 올라가 깃발을 쟁취해야만 한다. 그중 요리 경연은 남녀노소 모두가 좋아하는 데다, 불과 칼을 다루는 종목이다 보니 더욱 치열하고 살벌하다. 그러나 그 결과물에는 모두 환호한다. 이름이 오르내린 식당 앞에 새벽부터 장사진을 이룬 손님들이 이를 증명한다. 어느 한 민족의 문화에서 음식만큼 대표성을 띠는 것도 없다. 문화이기 전에 생존과 직결되니 가장 본질적이다. 흔히 의식주라고 하지만, 그 중요도로 치자면 북한식 용어인 ‘식의주’에 동의할 분들도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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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마거릿 대처와 국화, 아니 해바라기 “군중을 따르지 말고, 군중이 당신을 따르게 하라.”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가 한 말이다. 대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력한 리더십과 고집불통이다. 굳센 뱃심이 선한 방향으로 작동되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피곤하다. 대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나뉜다. 그녀는 문화예술 예산을 삭감하기도 하여 비판을 받았다. 예술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과 고집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반 고흐의 ‘국화(菊花)’를 보고 싶다고 말했던 그녀는 고흐의 또 다른 해바라기 작품이 경매에서 기록적인 가격에 팔리자, 사석에서 이렇게 말했다. “놀랍지 않나요? 반 고흐의 ‘국화’에 지급된 금액 말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글래스고 미술관장 줄리언 스펄딩이 정중히 바로잡아 주었다. “국화가 아니라 해바라기입니다. 총리님!”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그녀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또 그 그림이 고흐가 그린 최고의 ‘국화’도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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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나치 회스와 라일락 칸영화제와 아카데미상을 휩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기묘한 영화다. 얼핏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조명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파괴와 살육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섬뜩함과 잔인함이 밀려오는 공포영화에 가깝다. 글레이저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담장을 기준으로 안팎이 대비되는 모습은 흡사 키아라 메잘라마의 어린이 동화 <안팎정원>을 연상시킨다. 일부 장면은 적외선 카메라로 찍어 현실을 잔혹동화처럼 보여주는 것도 인상 깊다. 홀로코스트가 주제인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배경으로, 수용소 소장이자 영화 속 주인공 루돌프 회스는 실존 인물이다. 영화는 가해자의 시선으로만 상황을 설명한다. 바로 그런 시각이 피해자의 처절함과 비통함을 극대화한다. 피해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악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한 가족을 둔 가장이다. 그의 개인 일상은 그야말로 평안하고, 담장 너머의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처럼 무관하다. 해나 아렌트가 지적한 ‘악의 평범성’이라는 의미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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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이덕무와 윤회매 매화는 눈 속에 핀 것이 제일이다. 심사정의 ‘파교심매도’나 전기의 ‘매화초옥도’ 등도 설매(雪梅)가 주제다.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내며 꽃망울을 터트리는 고절한 자태에 모두 탄복했다. 지조, 절개 등의 덕목을 자랑하는 사대부들이 매화에 자신을 투영시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동양 정신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며 많은 이들이 칭송하고 추앙했으니, 매화가 사람이었다면, 꽤 젠체하며 거드름 피웠을 게다. 책벌레로 알려진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도 매화를 사랑했다. 그는 관매(觀梅)를 넘어서 직접 만들기까지 했다. 예로부터 종이나 비단, 모시 등으로 가화(假花)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지만, 그는 밀랍으로 매화를 만들고 ‘윤회매(輪回梅)’라 이름 지었다. 꽃잎은 밀랍으로, 꽃받침은 삼록지라는 종이로, 꽃술은 노루 털로, 꽃가루는 부들의 꽃가루 등으로 만들었다. 자칭 ‘책만 보는 바보’라고 했던 그는 서얼 출신이라 주요 관직에 등용되지 못했지만, 실학자 중 가장 박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백과사전식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윤회매의 재료며 형태까지 세밀하게 검토하고 실험하며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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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식물 대통령과 식물 언제부턴가 ‘식물 국회’ ‘식물 정부’ ‘식물 대통령’이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되었다. 인터넷 국어사전은 식물 국회를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국회’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식물 대통령은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대통령’이란 뜻이다. 안타깝게도 식물을 바라보는 우리 관점이 이 용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외국에는 이런 용어가 없는데, 급기야 외신에서 퍼 나르기 시작했다. 식물 국회든 식물 대통령이든 그 속에 숨은 뜻은 의당 부정적이니, 식물에 빚진 나로서는 못마땅한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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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괴테와 크리스마스트리 오래전, 독일 유학 시절에 크리스마스트리 판매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독일 친구와 함께 대형 슈퍼마켓 입구에 좌판을 벌였다. 전나무, 독일가문비 등 다양한 나무를 판매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보다 용돈벌이가 더 중요했던 젊은 날.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거리며 크리스마스트리를 팔던 일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신화적 뿌리가 인도게르만족의 우주수인지, 기독교 문화의 생명수인지, 또는 전혀 다른 유래인지 아직 결정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고대 게르만의 표상에 대한 기억’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게르만족 사이에서 한겨울에 푸른 나뭇가지를 가지고 축제를 벌이던 풍습이 일찍부터 전해왔기 때문이다. 한편, 독일에서 ‘거룩한 밤’을 뜻하는 성탄절(Weihnachten)은 옛날 동지제(冬至祭)나 고대 북유럽 겨울 축제인 율 축제(Julfest)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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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노벨과 꽃 ‘한강의 기적’. 인터넷에서 맨 처음 접했던 헤드라인이었다. 순간 새마을운동 시절 구호가 떠올랐다. 다행히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었다.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을까. 물론 노벨상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도 없거니와 전 세계인이 대한민국을 우러러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국이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시점에 노벨상, 그것도 문학상이라니. 잠깐이나마 눈이 번쩍 뜨이고,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우리는 노벨보다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그간 노벨상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별 감동 없다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참으로 얄궂은 심사다. 노벨상위원회 홈페이지를 뒤적여본 것도 이런 연유였는데, 노벨의 마지막 여정과 노벨상 연회에 관한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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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박용래와 강아지풀 강아지풀은 흔하디흔한 풀이다. 화려한 꽃이 피는 식물도 아니다. 그저 길가나 풀숲 귀퉁이에 자라 눈여겨보는 이도 없다. 사는 곳이 어디건 주인 행세도 하지 않는다. 긴 수염이 달린 좁쌀 같은 열매가 강아지 꼬리를 닮아 한자로는 구미초(狗尾草)라 한다.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강아지풀을 시인 박용래는 ‘가장 사랑하는 한마디의 말’이라 했다. 고개 숙인 강아지풀의 턱밑을 간질이며 강아지 어르듯 ‘오요요 내 강아지’ 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강아지풀을 집에서 기르는 털북숭이 강아지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 그의 만물 사랑은 넓고도 깊어 동식물 구분이 없었다. 그는 강아지풀을 보고 “빛을 바라며 어둠 속에서 우는 어린이 같은 존재”라고 했지만, 나는 시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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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유박(柳璞)과 화품(花品) 어느 시대나 덕후는 있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에 꽂혀 모든 걸 쏟아붓는 열정은 옛날이라고 다를 리 없다. 조선 후기 꽃에 꽂힌 덕후가 있었으니, 황해도 배천의 금곡 출신 유박이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 벼슬의 꿈을 버리고 서해 바닷가에 백화암이라는 정원을 짓고 평생을 살았다. 돈만 생기면 꽃에 몰빵하며 외국산 꽃도 마다하지 않았다. 채제공과 유득공 등 당대 문인들도 앞다투어 그의 화벽(花癖)에 관한 글을 남겼다. 당시에는 꽃의 모습과 생리, 운치와 상징성 등을 기준으로 꽃을 품평하는 것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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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히포크라테스와 버즘나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명언은 어느 철학자나 예술가가 한 말로 흔히 생각하기 쉽지만,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원문장의 뜻은 “인생은 짧고, 의술(의 숙련)은 오래 걸려(Vita brevis, ars longa), 기회는 덧없이 사라지고 경험은 불확실하니 판단키 어렵구나”이다. 라틴어 ‘ars’는 지금의 예술(arts)이 아니라, 의술 또는 기술 정도로 해석한다. 의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고뇌, 그리고 근면 성실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의사로서의 주요 덕목인 윤리와 철학을 강조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술의 근본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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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쉰들러와 캐롭나무 공자의 제자 자로가 ‘성인(成人)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눈앞에 이익을 보면 우선 의로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2500여년 전 공자의 말씀 견리사의(見利思義)를 실천한 인물이 오스카 쉰들러다. 그는 ‘된 사람(成人)’이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계 체코인으로 독일 방첩부대에서 근무했으며 나치당에도 가입했던 인물이다. 독일이 폴란드 침공 전까지 폴란드에서 일하며 나치를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에나멜 제품 공장을 운영했는데, 노동자의 약 70%가 유대인이었다. 그래서일까. 한때 독일을 위해 일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200명의 유대인을 구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SS 대원들에게 뇌물을 주며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등의 학살 수용소로 호송되는 것을 막았다. 거기에는 과거 독일 방첩부대 근무 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전후에는 아르헨티나, 독일 등지를 떠돌며 사업을 벌였지만 실패하고, 그가 전쟁 중에 구해주었던 일명 ‘쉰들러 유대인’들의 경제적 도움으로 살아갔다. 나락으로 떨어지던 유대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쉰들러. 그의 도움으로 지옥에서 탈출했던 유대인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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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고국천왕과 소나무 우씨 왕후가 돌아갔다. 임종 때 유언하기를, “내 행실에 실수가 있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일 신하들이 차마 나를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 곁에 묻어주시오.” 고구려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의 아내로 살았던 왕후 우씨. 그는 시동생인 산상왕과의 관계를 후회하면서도 남편이 아닌 시동생 곁에 묻히고자 했다. 고국천왕은 죽어서도 우씨의 행실에 화가 동했는지, 무당의 꿈속에 나타나 울분을 토했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내가 분을 참지 못하여 그와 싸웠소. 물러나 생각하니 낯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소. 자네가 조정에 알려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오. 그러자 사람들은 능 앞에 소나무 일곱 겹을 심었다.”(<삼국사기> 권 17, ‘고구려 본기’ 제5 동천왕 8년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