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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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식물 대통령과 식물 언제부턴가 ‘식물 국회’ ‘식물 정부’ ‘식물 대통령’이라는 말이 일상용어가 되었다. 인터넷 국어사전은 식물 국회를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국회’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식물 대통령은 ‘움직임이 없고 제 기능을 못하는 대통령’이란 뜻이다. 안타깝게도 식물을 바라보는 우리 관점이 이 용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외국에는 이런 용어가 없는데, 급기야 외신에서 퍼 나르기 시작했다. 식물 국회든 식물 대통령이든 그 속에 숨은 뜻은 의당 부정적이니, 식물에 빚진 나로서는 못마땅한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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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괴테와 크리스마스트리 오래전, 독일 유학 시절에 크리스마스트리 판매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독일 친구와 함께 대형 슈퍼마켓 입구에 좌판을 벌였다. 전나무, 독일가문비 등 다양한 나무를 판매했다. 크리스마스의 의미보다 용돈벌이가 더 중요했던 젊은 날. 추운 날씨에 발을 동동거리며 크리스마스트리를 팔던 일이 지금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신화적 뿌리가 인도게르만족의 우주수인지, 기독교 문화의 생명수인지, 또는 전혀 다른 유래인지 아직 결정적으로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고대 게르만의 표상에 대한 기억’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게르만족 사이에서 한겨울에 푸른 나뭇가지를 가지고 축제를 벌이던 풍습이 일찍부터 전해왔기 때문이다. 한편, 독일에서 ‘거룩한 밤’을 뜻하는 성탄절(Weihnachten)은 옛날 동지제(冬至祭)나 고대 북유럽 겨울 축제인 율 축제(Julfest)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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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노벨과 꽃 ‘한강의 기적’. 인터넷에서 맨 처음 접했던 헤드라인이었다. 순간 새마을운동 시절 구호가 떠올랐다. 다행히 지명이 아니라 인명이었다. 이런 경사가 또 어디 있을까. 물론 노벨상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도 없거니와 전 세계인이 대한민국을 우러러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정국이 점점 수렁에 빠져드는 시점에 노벨상, 그것도 문학상이라니. 잠깐이나마 눈이 번쩍 뜨이고,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우리는 노벨보다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그간 노벨상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별 감동 없다가, 갑자기 가깝게 느껴졌다. 참으로 얄궂은 심사다. 노벨상위원회 홈페이지를 뒤적여본 것도 이런 연유였는데, 노벨의 마지막 여정과 노벨상 연회에 관한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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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박용래와 강아지풀 강아지풀은 흔하디흔한 풀이다. 화려한 꽃이 피는 식물도 아니다. 그저 길가나 풀숲 귀퉁이에 자라 눈여겨보는 이도 없다. 사는 곳이 어디건 주인 행세도 하지 않는다. 긴 수염이 달린 좁쌀 같은 열매가 강아지 꼬리를 닮아 한자로는 구미초(狗尾草)라 한다.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강아지풀을 시인 박용래는 ‘가장 사랑하는 한마디의 말’이라 했다. 고개 숙인 강아지풀의 턱밑을 간질이며 강아지 어르듯 ‘오요요 내 강아지’ 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강아지풀을 집에서 기르는 털북숭이 강아지로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 그의 만물 사랑은 넓고도 깊어 동식물 구분이 없었다. 그는 강아지풀을 보고 “빛을 바라며 어둠 속에서 우는 어린이 같은 존재”라고 했지만, 나는 시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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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유박(柳璞)과 화품(花品) 어느 시대나 덕후는 있게 마련이다. 좋아하는 것에 꽂혀 모든 걸 쏟아붓는 열정은 옛날이라고 다를 리 없다. 조선 후기 꽃에 꽂힌 덕후가 있었으니, 황해도 배천의 금곡 출신 유박이다.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 벼슬의 꿈을 버리고 서해 바닷가에 백화암이라는 정원을 짓고 평생을 살았다. 돈만 생기면 꽃에 몰빵하며 외국산 꽃도 마다하지 않았다. 채제공과 유득공 등 당대 문인들도 앞다투어 그의 화벽(花癖)에 관한 글을 남겼다. 당시에는 꽃의 모습과 생리, 운치와 상징성 등을 기준으로 꽃을 품평하는 것이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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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히포크라테스와 버즘나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명언은 어느 철학자나 예술가가 한 말로 흔히 생각하기 쉽지만,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원문장의 뜻은 “인생은 짧고, 의술(의 숙련)은 오래 걸려(Vita brevis, ars longa), 기회는 덧없이 사라지고 경험은 불확실하니 판단키 어렵구나”이다. 라틴어 ‘ars’는 지금의 예술(arts)이 아니라, 의술 또는 기술 정도로 해석한다. 의술에 대한 그의 열정과 고뇌, 그리고 근면 성실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의사로서의 주요 덕목인 윤리와 철학을 강조한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의술의 근본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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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쉰들러와 캐롭나무 공자의 제자 자로가 ‘성인(成人)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눈앞에 이익을 보면 우선 의로움을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답한다. 2500여년 전 공자의 말씀 견리사의(見利思義)를 실천한 인물이 오스카 쉰들러다. 그는 ‘된 사람(成人)’이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오스카 쉰들러는 독일계 체코인으로 독일 방첩부대에서 근무했으며 나치당에도 가입했던 인물이다. 독일이 폴란드 침공 전까지 폴란드에서 일하며 나치를 위해 정보를 수집했다. 그는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에나멜 제품 공장을 운영했는데, 노동자의 약 70%가 유대인이었다. 그래서일까. 한때 독일을 위해 일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약 1200명의 유대인을 구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SS 대원들에게 뇌물을 주며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 등의 학살 수용소로 호송되는 것을 막았다. 거기에는 과거 독일 방첩부대 근무 이력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전후에는 아르헨티나, 독일 등지를 떠돌며 사업을 벌였지만 실패하고, 그가 전쟁 중에 구해주었던 일명 ‘쉰들러 유대인’들의 경제적 도움으로 살아갔다. 나락으로 떨어지던 유대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쉰들러. 그의 도움으로 지옥에서 탈출했던 유대인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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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고국천왕과 소나무 우씨 왕후가 돌아갔다. 임종 때 유언하기를, “내 행실에 실수가 있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고국천왕)을 보겠는가? 만일 신하들이 차마 나를 구렁텅이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 곁에 묻어주시오.” 고구려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의 아내로 살았던 왕후 우씨. 그는 시동생인 산상왕과의 관계를 후회하면서도 남편이 아닌 시동생 곁에 묻히고자 했다. 고국천왕은 죽어서도 우씨의 행실에 화가 동했는지, 무당의 꿈속에 나타나 울분을 토했다.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내가 분을 참지 못하여 그와 싸웠소. 물러나 생각하니 낯이 두꺼워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소. 자네가 조정에 알려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게 하오. 그러자 사람들은 능 앞에 소나무 일곱 겹을 심었다.”(<삼국사기> 권 17, ‘고구려 본기’ 제5 동천왕 8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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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김열과 소나무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면 이미 군내부터 난다. 이때는 허접한 훈계나 치졸한 영웅담일 경우가 많다. 대화란 주고받는 것인데, 지위나 나이를 무기 삼아 상대방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기 말만 앞세우면 일방통행일 뿐. 서로 통하지 않는 대화는 답답함만 남는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격식과 품위를 갖춘 만남은 오래 기억된다. 450여년 전 임경당 김열과 율곡 이이가 그럴 것이다. 강릉에 터전을 둔 김열은 율곡의 고향 어르신이자 강릉 십이향현 중 한 사람이다. 향교 교관으로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 처사로 남아 경서 강독에 전념하였다. 조상 대대로 살던 그의 집 뒷동산에는 선친이 심고 가꿨던 소나무 숲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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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가야마 미쓰로와 옥잠화 주말마다 오르는 인왕산 자락길에 옥잠화가 피었다. 꽃잎이 백옥같이 흰 옥잠화는 봉오리가 옥비녀(玉簪)와 똑같다. 깨끗하고 유려한 꽃 모습이 아름다워 정조와 다산도 옥잠화에 대한 시를 지었다. 최남선,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평가받던 가야마 미쓰로도 옥잠화를 사랑했다. 1940년 2월20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그는 ‘창씨(創氏)와 나’라는 제목으로 창씨개명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의지를 밝힌다. “나는 일본인이 되는 결심으로 성을 향산(香山)이라고 하고 이름을 광랑(光郞)이라고 하였다. 내 처자도 모조리 일본식 이름으로 고쳤다. (…)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성과 이름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광수는 가야마 미쓰로(香山光浪)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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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김민기와 상록수 혼밥도 좋지만, 여럿이 왁자지껄 떠들며 함께 먹는 음식엔 공유의 미덕이 있다. 그것이 술잔이든, 감정이든, 또는 땀 냄새든. 예술도 마찬가지다. 오감으로 느끼는 예술 중 가장 손쉽고 흔히 접하는 게 음악일 것이다. 감성을 동시에 같이 나눌 수 있는 것도 음악이다. 합주가 그렇고 합창이 그렇다. 모두 함께 부르는 떼창은 참여와 공유의 감동이 있다.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고단했던 내 젊은 날을 지탱해준 비타민이었다. 거의 반세기 동안 힘들 때마다 그 노래를 웅얼거리며 나는 다시 일어섰다. 노래를 부를 일이 거의 없는 요즘에도 티브이나 라디오에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가슴속 저 아래서부터 무언가 뜨끈하고 단단한 게 서서히 차오른다. 고리타분한 꼰대가 된 지금도 가슴이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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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의 인물과 식물 쿠베르탱과 올리브나무 제2의 프랑스 혁명, 파리 올림픽이 드디어 개막되었다. 사상 처음 시도된 야외 개회식은 파리 센강을 중심으로 시내 전체를 관통하며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보여준 한 편의 야외 오페라였다. 파격적이고 혁명적이었던 개회식을 통해 다양성과 독창성을 추구하는 프랑스의 자유정신을 마음껏 발산하였다. 올림픽의 엠블럼은 또 어떤가. 불꽃 속에 숨어 있는 자유의 여신은 고혹적이기까지 하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100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열리는 올림픽이거니와 현대 올림픽의 시조가 프랑스 파리 출신이니 프랑스인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행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