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과 마농지

이선 한국전통문화대 명예교수

제주는 언제나 옳다. 학생들과 매년 한라산 답사를 가면서도 시간을 내어 가족과 또다시 제주를 찾는다. 품 너른 한라산과 올망졸망한 오름, 울창한 녹지와 조응하는 짙푸른 바다, 나지막한 집들과 진회색 스펀지 돌담, 소박하고 뭉근한 제주 밥상이 나를 이끈다.

설문대할망이 점지해 준 자연이 싱둥하고 한없이 평화로운 제주에도, 쓰라린 과거가 있다. 우연히 들른 제주시 주정공장수용소 4·3역사관에서 또다시 그 과거를 마주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고구마 주정으로 항공기 연료를 생산했고, 1949년부터 수많은 사람을 감금했던 수용소로 쓰였다. 불법적 군사재판을 받고 육지 교도소로 끌려가는 모습의 역사관 앞 조각상이 처절했던 당시를 말해준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심했던 4·3사건은 제주도민에게 쉽게 꺼낼 수 없지만, 잊히지 않는 과거다. 그 살벌한 와중에도 의인은 있었으니, 당시 성산포서장 문형순이다. 좌익 혐의를 받는 예비검속자를 즉결 처분하라는 군인의 지시에도 그는 ‘부당함으로(부당하므로) 불이행’이란 유명한 메모를 남기고 죽음의 벼랑 끝에 서 있던 수백명을 구했다. 부끄럽게도 나는 4·3역사관에서 문형순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의 외로운 죽음도.

그로부터 70여년이 흐른 2022년 8월9일, 4·3사건 재심이 열렸다. 재판부 장찬수 부장판사는, “오늘의 무죄 선고로 피고인들과 그 유족들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벗겨지고 고인이 된 피고인들이 저승에서라도 오른쪽과 왼쪽을 따지지 않고 양푼에 담은 지실밥(감자밥)에 마농지(마늘장아찌)뿐인 밥상이라도 그리운 사람과 마음 편하게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덧붙여, “과연 국가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며 국가의 책임을 물었다. 서슬이 시퍼런 재판정에서 이처럼 서정적이고 가슴을 울리는 선고문이라니. 특히 ‘저승에서라도 오른쪽과 왼쪽을 따지지 않고’라는 대목에서 한동안 나는 가슴이 턱 막혔다.

좌우를 따지며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서로 할퀴었는가.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이제 모두 지실밥과 마농지로 차린 밥상에 마주 앉아 서로 마음을 나누는 식구가 되면 어떠랴. 보잘것없지만 그리운 사람과 함께 먹는 지실밥과 마농지는 만한전석 부럽지 않다. ‘엿날 우리 어멍이 멩글아 줘난 마농지만 이시민 밥 한 사발 문짝하게 먹어져마씀.’ 제주도민들에게 4·3은 마농지만큼이나 짜고 아린 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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