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터를 홀로 지켜온 큰 나무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진천 보탑사 느티나무

진천 보탑사 느티나무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는다. 세월이 흐르면 한때 번성했던 절집이라 해도 터만 남기고 가뭇없이 사라진다. 홀로 사람살이의 무늬를 지키는 건 오직 큰 나무뿐이다.

문헌 기록조차 따로 남지 않아 내력을 알기 어려운 충북 진천 보련산 자락의 ‘연곡리 절터’도 그렇다. 전각은 물론이고, 절집 이름조차 사라진 폐허의 터다. 그나마 10세기에 세워진 ‘진천 연곡리 석비’가 남아 있어서 고려 전기에 번창했던 절집으로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 석비조차 명문이 없는 백비(白碑)여서 절집 내력의 실마리는 찾을 수 없다.

폐허의 절터에 다시 절집을 일으켜 세우기로 한 건 1991년부터였다. 절집 자리를 궁리하던 그때의 기준은 무엇보다 한 그루의 오래된 나무였으리라. 사람의 기억이 사라진 절터를 지켜온 유일한 생명체인 까닭이다.

‘진천 보탑사 느티나무’는 2003년에 불사를 마친 새 절집 ‘보탑사’의 풍광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절집에 들어서려면 나무 곁의 돌계단을 오르며 자연스레 나무를 바라보게 된다. 나무는 절집의 사천왕문을 마주하고 섰는데, 마치 예전부터 바로 이 자리에 절집의 정자나무로 서 있었던 양 자연스럽다.

대략 400년 세월을 살아온 것으로 짐작되는 이 나무를 마을 사람들은 옛 스님이 심어 키운 나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절집이 언제 폐사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의 신빙성은 떨어진다.

나무는 높이 18m까지 자랐는데, 중심 줄기는 3m쯤 높이에서 여러 개의 굵은 가지로 나눠지며 사방으로 고르게 펼쳤다. 나뭇가지 펼침 폭은 동서로 26m, 남북으로 21m에 이를 만큼 넓어서 나무 한 그루가 드리우는 그늘은 천연의 쉼터를 이룬다.

사실 이 정도의 연륜과 규모를 갖춘 느티나무가 희귀한 건 아니다. 그러나 느티나무로서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기억이 사라진 폐허의 터에서 잊어진 기억의 실마리를 짚어보게 하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한번 더 바라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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