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게 한 느티나무

고규홍 나무 칼럼니스트
해남 두륜산 천년수.

해남 두륜산 천년수.

설 쇠고, 나이 혹은 세월의 흐름을 돌아보게 되는 즈음이다. 나이 드는 걸 심드렁하게 느끼는 축이 있는가 하면, 활기차게 받아들이는 축도 있겠지만, 어느 쪽이 됐든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은 세월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는 건 분명하다.

빠르게 흐르는 세월을 묶어두는 데에 이용했던 나무가 있다. 땅끝 해남의 고찰 대흥사가 깃든 두륜산 마루에 서 있는 ‘천년수(千年樹)’라는 이름의 느티나무다. 산내 암자 ‘만일암’이 있던 폐사지여서 ‘만일암터 천년수’라고도 부른다.

폐사지 가장자리에 서 있는 천년수는 무려 1100년이나 된 큰 나무다. 산림청 보호수로 등록된 느티나무 가운데 수령으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오래된 나무다. 대숲 우거진 한가운데 서 있는 탓에 나무 우듬지를 바라보려면 고개를 한껏 젖혀 올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바라보는 사람을 한눈에 압도하는 융륭한 나무다.

이 나무에는 시간을 붙들어 매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하늘에 살던 천녀와 천동이라는 두 젊은이가 죄를 짓고, 두륜산으로 쫓겨 왔던 옛날이야기다. 상제는 그들에게 하루 만에 산 위에 불상을 짓는다면 그들을 용서하여 하늘로 올려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모자랐던 천녀와 천동은 우선 해가 넘어가지 못하도록 산 위로 걸린 해를 나무에 밧줄로 매어두고 조각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 불상을 완성한 천녀는 나무 앞에 돌아왔지만 천동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다급해진 천녀는 해를 묶었던 밧줄을 끊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나 불상을 완성하지 못한 천동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해 두륜산 신령으로 남았다는 전설이다.

실제로 두륜산 북미륵암에는 완성된 불상이 있고, 천동이 짓던 남미륵암의 불상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다. 천년수가 서 있는 자리의 만일암이라는 이름은 잡아당긴다는 ‘만(挽)’과 해를 뜻하는 ‘일(日)’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해를 붙들어 맨 암자라는 뜻이다.

지나온 자취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새해를 맞이하는 게 안타까운 이즈음, 넘어가는 해를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은 옛사람에게만 드는 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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